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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의 집 - 개정판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권여선
자음과모음
개정판 2020.11
(초판 2014.11)

삼악동은 삼악산 남쪽 면을 복개해 산복 도로를 만들면서 생겨난 동네였다. 도로 양쪽으로 골목골목 마을이 있어 잿빛 다족류 벌레처럼 보였다. 그래서 삼악동이라는 이름 대신 삼벌레고개라고 불린다. 삼벌레고개 중턱, 말라버린 우물 옆에 있는 우물집에 새로운 가족이 이사를 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물집 주인 순분과 만춘, 금철과 은철. 바깥채에 세 든 새댁과 덕규, 영과 원. 이들이 1년 동안 함께 지내는 동안의 일들이다.
은철과 원은 비밀을 캐내는 스파이라고 스스로를 칭하며 마을 사람들에 대해 알아가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에겐 저주를 내리기도 한다.
주변 인물들,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의 눈에 비친 모습으로 소개가 된다. 아이들의 주고받는 이야기들, 노는 모양들이 순수하고 해맑다. 아이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렵거나 무서운 일들도 많았다. 그래도 즐겁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원의 아버지 안덕규에게는 비밀이 있는 듯하다. 그러던 어느 날 덕규의 손님들이 원의 집에 놀러와 원에게 예쁜 인형을 선물하고, 어머니는 맛있는 음식들을 대접한 그날 이후로 행복한 날들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은철은 원이네 집에 놀러 가지 않게 됐고, 대신 형을 따라나섰다가 다리에 장애를 입게 되었다. 그리고 덕규는 소풍 가기로 한 날 경찰들에게 잡혀가 시신으로 돌아오게 됐다. 그 일로 새댁은 정신이 온전할 수 없어 병원으로 들어가게 되고 원은 입을 다물게 됐다.
이 책에서 확실히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덕규가 잡혀간 일은 '인혁당' 사건을 말한다고 한다.
인혁당 사건 : 1960~70년대 중앙정보부가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북한의 지령을 받는 지하조직을 결성했다'고 발표하여, 다수의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 교수, 학생 등이 검거된 사건. 2007년과 2008년 사법부의 재심에서 관련자 전원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두산백과)
유신정권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간첩, 빨갱이로 몰려 8명이 사형에 처해졌고, 다른 사람들도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평범했던 가족을 산산이 부서지게 한 자는 누구인가? 누가 이 가족을 지켜줘야 하는 것이었나... 하는 생각에 답답한 마음이 든다. 그 시대에는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 것인가...? 어디에도 잡혀가지 않고, 사형도 당하지 않고 매일 나가서 꼬박꼬박 돈을 벌어오는 남편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순분도 생각했던 것처럼.. 그냥 그래야 하는 것인가?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고 살았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역사 속 일이었던 이 일이 '인혁당사건'이라는 다섯 글자로 알고 넘어가기엔 너무나 고통받은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알아주고, 같이 마음 아파해주는 것이 그들에게 위로가 되는 일이라면 함께 그러고 싶다.
어린 스파이들은 회복할 수없이 망가진 것들 때문에 울었다. 일 년도 안 된 지난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서 울었다. 이 모든 일이 어린 그들에게 지나치게 억울하고 가혹해서 울었다. (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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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쪽) 그 순간 은철은 손바닥 보듯 환히 알게 되었다. 지동순 할매가 소리 소문 없이 삼벌레고개를 떠난 이유를. 할매는 평상 위에 오롯이 새겨진 뚜벅이 할배의 없음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오고 갈 때마다 할매만 보면 벌떡 일어나던 그 할배의 없음을. 그 강한 부재의 힘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은철은 그 할매처럼, 뚜벅이 할배의 걸음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슬픔을 생생히 느꼈다.
248쪽) 덕규는 예의가 깍듯한 회색 양복의 음성에서 냉기를 느꼈다. 달팽이의 배를 뾰족한 압정으로 찌르면 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을까 싶은 찌르르한 전기 충격이 옆구리를 스쳤다. 그는 자신이 두려워할까 봐 두려웠다.
259쪽) 언니의 교과서에서 산사태와 눈사태에 대한 내용을 읽고 무거운 흙 속에 깜깜하게 갇히는 산사태와 차디찬 눈 속에 꽁꽁 얼어 갇히는 눈사태를 상상해보고 어느 것이 더 무서울지 알 수 없었던 때와 비슷했다. '사태'라는 말처럼 무서운 말은 없는 것 같았다.
원은 지금의 사태가 무엇인지 몰라 답답하고 무서웠다.
295쪽) 원은 자기가 우물에 묶여서 내린 저주 때문에 아버지가 산사태에 갇힌 사람처럼 무거운 흙더미 속에 파묻히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331쪽) 나는 그들의 고통은 물론이고, 내 몸에서 나온, 그 어린 고통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고통 앞에서 내 언어는 늘 실패하고 정지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 어린 고통이 세상의 커다란 고통의 품에 안기를 그 순간의 온기를 위해 이제껏 글을 써왔다는걸.
그리하여 오늘도 미완의 다리 앞에서 직녀처럼 당신을 기다린다는걸. (작가의 말 중에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