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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리쾨르의 철학
윤성우 지음 / 철학과현실사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폴 리쾨르는 1913년 2월 27일 태어났다. 우리 식으로 계산하면 아흔 둘의 고령인데도 출판물을 계속 내어놓고 있으니 현존하는 서양 철학자 가운데 가장 생명이 긴 철학자이다. 이 점에서 리쾨르는 독일의 해석학 철학자 가다머와 비슷하다. 하지만 철학적 여정은 가다머와 다르다. 리쾨르는 애초 반성철학에서 시작하였음에도 현상학과 해석학을 자신의 철학적 방법론으로 수용하면서 인간 실존을 개념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철학적 노력을 끊임없이 시도한다. 리쾨르의 인간 실존 해명은 다양한 주제를 통해 이어진다. 의지적인 면과 비의지적인 면, 인간의 오류 가능성과 죄책의 경험, 악의 문제 등 대체로 초기 철학에서 관심을 보인 주제들로부터 무의식, 언어, 담론, 텍스트, 이야기, 자아, 타자, 정의 문제 등이 모두 이 문제와 관련 있다. 이러한 가운데 리쾨르는 예컨대 정신분석, 언어학, 인류학, 성경 해석학 등 인접 분야를 동원하고 데카르트와 메느 드 비랑과 나베르와 마르셀 등 프랑스 반성철학, 칸트와 헤겔, 슐라이마허와 딜타이, 후설과 하이데거, 가다머의 독일철학, 그리고 현대 영미 철학을 폭넓게 동원한다. 그래서 리쾨르는 자신의 문제에 집중하면서도 유럽 대륙과 영미 현대철학을 폭넓게 수용, 대화, 그리고 나아가서 대안을 제시하고자 애쓰는 철학자로 자리 매김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리쾨르 철학을 개괄적으로 다룬 책이 최근 철학과현실사를 통해 출판되었다. 윤성우 박사의 『폴 리쾨르의 철학』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외대 불어과를 나와 외대에서 철학으로 석, 박사과정을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다시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폴 리쾨르에서 주체의 물음>이란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국내에 돌아와 활동하고 있는 젊은 철학자이다. 저자가 박사 학위 논문 주제로 다룬 주체의 물음은 리쾨르 철학의 일관된 관심이었던 인간 실존 해명과 곧장 관련된다. 왜냐하면 실존 해명은 다르게 말하자면 인간 주체의 의미를 다시 이해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저자가 리쾨르의 주체 물음을 학위 논문 주제로 다루었다는 것은 리쾨르 철학 전체를 초기부터 최근까지 전체적으로 섭렵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저자는 리쾨르 철학을 소개하기에 누구보다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모두 10장과 부록으로 되어 있다. 제1장은 리쾨르가 자신의 철학을 처음으로 드러낸 <의지의 철학>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리쾨르의 의지의 철학은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 인간의 오류 가능성과 죄책 가능성, 그리고 악의 상징을 다루는 부분으로 모두 셋으로 나누어지는데, 저자는 그 가운데 첫 부분을 다루면서 자유와 자연, 의지와 신체,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이 서로 의미와 조건 관계를 맺고 있음을 밝혀낸다. 여기서 주체는 철저히 몸이 있는 주체, 신체적 주체로 드러난다. 제2장은 비교적 짧은 장인데 여기서는 리쾨르 철학이 어떻게 해석학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수 있는지를 논의한다. 제3장은 리쾨르의 주체 개념을 좀 더 체계적으로 다룬 글인데 주체 물음에는 신체적, 언어적, 상호 인격적, 그리고 제도적 차원 등 여러 차원이 있다는 점과 주체 문제를 다루는 데는 반성철학과 현상학, 그리고 해석학, 이 세 전통이 리쾨르에서 만난다는 점, 그리고 주체 물음에는 신체, 언어, 타자 및 제도 이렇게 세 차원이 해석학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잘 밝혀준다. 제4장은 주체 문제를 언어와 관련해서 다루면서 리쾨르의 텍스트의 해석학을 비교적 소상하게 소개해준다. 이 장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점은, 주체는 언제나 텍스트의 매개를 거친 주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직접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주체는 없다. 이어서 제5장에서 7장까지는 리쾨르의 해석학이 어떻게 기독교의 성서 해석학과 딜타이의 해석학, 그리고 신화 해석과 관련되는지를 밝히고 제8장은 80년대 중반 리쾨르의 대작인 『시간과 이야기』 세 권에 대한 짧은 해제를 담고 있다. 제9장과 10장은 리쾨르 자신이 자신의 주저라고 밝힌 『한 타자로서 자기 자신』(1990)을 중심으로 자기 동일성 이론과 리쾨르의 윤리학을 다루면서 주체 문제를 ‘자기성’의 문제와 관련해 다룬다.
이 책은 몇 가지 점에서 미덕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우선 무엇보다도 리쾨르 철학 전체를 연대별로, 주저별로 소상하게 서술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리쾨르 철학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윤곽만이라도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리쾨르의 초기 철학부터 최근까지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단행본으로는 이 책이 국내에서는 처음일 것이다. 읽기에 무리 없이 비교적 명료하게 쓰여졌다는 것도 이 책이 지닌 또 다른 미덕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은 앞에서도 몇 번 언급했지만 역시 주체 문제가 리쾨르에게서 어떻게 다루어지는지를 비교적 소상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의 주장대로 리쾨르는 주체를 절대화하는 편에 서지 않을 뿐더러 주체의 죽음 또는 주체의 해체를 주장하는 철학자들 편에 서지 않는다. 이 점에서 리쾨르는 현대 철학자들 가운데서 레비나스와 견줄만하다. 레비나스도 리쾨르와 마찬가지로 데카르트적인 코기토의 주체를 거부하지만 그렇다고 주체를 완전히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레비나스는 주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레비나스가 부여한 주체의 의미는 한 마디로 ‘타인을 위한 존재’이다. 나의 존재 유지 욕망을 벗어나 타인에 대해서, 타인을 위해서 책임지며 타인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주체가 진정한 주체로 그려진다. ‘타인을 위한 존재’라는 데에 나의 궁극적 존재 의미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레비나스의 주체는 윤리적 의미를 강하게 띠게 된다. 이 주체는 존재를 넘어, 존재 저편의 주체이다. 이 점에서 리쾨르는 레비나스와 구별된다. 리쾨르도 레비나스와 마찬가지로 타자를 강조한다. 바람직한 윤리적 삶을 리쾨르는 ‘정의로운 제도 안에서 타자와 더불어, 타자를 위하여 좋은 삶을 지향하는 삶’이라 정의할 때 타자의 중요성이 등장한다. 하지만 타자와 더불어, 타자를 위하여 삶을 사는 주체는 역시 ‘나’이다. 그러므로 타자를 위한 삶을 살 수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존경심,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선행한다. 그러므로 리쾨르는 레비나스가 앞 서 나간 지점까지 따라 나설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레비나스가 대안으로 제시한 주체는 타인을 대신하고 타인을 위해 스스로 인질이 될 정도로 완전히 자기를 버린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리쾨르의 주체는 훨씬 온건하고 훨씬 더 상식적인 수준의 주체로 보인다. 이런 주체의 모습을 저자는 이 책 안에서 잘 그려주고 있다.
리쾨르의 저서와 연구서, 그리고 리쾨르 관련 연구 논문과 리쾨르의 국내 번역서 및 연구물 목록을 뒤에 붙여 두었다. 좀 더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혹시 개정판을 낼 기회가 있을 때 반영했으면 하는 의견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이 책이 리쾨르 철학을 전반적으로 다루는 입문서를 겨냥했다면 리쾨르의 생애와 저작에 관한 소개가 먼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둘째, 책 서두나 문헌 목록 가운데 리쾨르 저작 약어표를 일목요연하게 달았다면 훨씬 쉽게 출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리쾨르 철학을 해석학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다룬 제2장을 오히려 제1장으로 삼았다면 리쾨르 철학 전반을 먼저 이해한 뒤, 좀 더 각론적으로 리쾨르의 ‘의지의 철학’, 주체 물음, 텍스트 문제 등을 이해하는 일로 쉽게 옮겨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제8장 <시간과 이야기>에 대한 해제도 좀 더 많은 분량을 할애했더라면 대단히 난해한 책이 현재 시점에서 지닌 철학적 의의를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데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 권이나 되는 책을 불과 8쪽 안에 다룬 것은 아무리 짧게 쓴다고 해도 너무 짧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들뢰즈에 관한 글이 부록으로 붙어 있는데 리쾨르와 전혀 무관하게 그냥 책 뒤에 붙어 있기 때문에 차라리 포함시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오자가 생각보다 많은 것도 적지 않은 흠이다. 그러나 리쾨르에 관한 전반적인 소개서가 없는 상황에서 이 책은 리쾨르 철학을 이해하는데 좋은 입문서가 될 것이다. 저자의 좀 더 본격적인 리쾨르 연구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