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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에게서 답을 찾다 - 환경파괴와 빈부격차, 전쟁과 기근에 빠진 세계
브라이언 맥클라렌 지음, 김선일 옮김 / 포이에마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마 선생님.
오랜만에 소식 전합니다. 지난 몇 개월은 너무 분주하고 바빠서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면 큼직큼직한 일들이 주변에서 있었는데 마치 외계에서 살다온 것처럼 마음을 멀리 떨어뜨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덕에 지난번에 보내주신 책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기회를 놓쳐버렸고요. <예수에게서 답을 찾다>라는 ‘브라이언 맥클라렌’의 책요.
이 책이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보는 브라이언의 책입니다. 첫 번째 책에서 워낙 강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이번에 보내주신 책을 받으면서 내심 기대를 했습니다. 역시 기대 이상으로 우리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집어주더군요. 세상이 번영과 안전과 공정이라는 시스템의 결합에 의해서 돌아가는 곳이라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과 다르게 세상은 번영도 안전도 공정도 없는 자살기계에 불과하다는 그의 강조는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전쟁과 기근, 빈부격차 문제와 지구온난화 문제까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회자되는 지구적인 차원의 모든 염려가 전부 그 안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인데, 세상을 살리기 위해서 돌리는 시스템이 실제로는 우리 모두를 죽이고 있다는 얘기로 이해했습니다.
저자는 생태적인 관점의 무지와 무책임을 가장 강조하는 것 같더군요.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마치 무한으로 공급되는 자원을 쓰는 것처럼 처신하고 있고, 자연환경이 쓰레기를 처리하는 능력은 제한되어 있는데 마치 자연이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이 가지는 이기심이 지속 가능한 세상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만 어쨌든 저자의 눈에는 우리 모두가 현재 공멸로 치닫는 세상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듯합니다. 그래서 책의 원제목을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한다”(Everything must change)고 붙인 것 같고요.
저자는 세상이 이렇게 잘못된 방식으로 돌아가는 이유를 길게 설명하면서 <틀>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틀>이라고 하는 게 뭘 말하는지 선뜻 그림이 안 그려졌는데 화란의 철학자 ‘카웃츠바르트’를 인용하는 것을 보면서 그게 <세계관>을 의미하는 말인 것을 알았습니다. <틀>이라고 하지 말고 차라리 보통 쓰는 표현처럼 <안경>이라고 했으면 더 잘 알아들었겠다 싶었습니다.
브라이언이 이 책에서 도전하는 것은 “지금 자살기계 같은 이런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왜 기독교는 항상 딴 세상 이야기만 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이유를 하나 집어주었는데 그것은 오늘날 기독교가 예수님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를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대해서도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틀> 이야기도 거기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틀로 세상을 봐야 하는데 그 당시 로마 제국의 관점으로 만들어진 틀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교회는 항상 엉뚱한 방향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국의 관점과 예수님의 관점을 상세하게 비교해 주었습니다. 마 선생님께서 책을 추천하실 때는 저자의 관점이나 논조에 동의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도 기본적으로는 그의 지적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브라이언의 지적 자체가 지나친 편견이고 오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그 범위와 정도가 특별히 물고 늘어져야 할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저자는 두 가지 틀을 그렇게 보여주고는 예수님의 틀로 세상을 보는 법을 길게 설명했습니다. 처음에 말했던 세 가지 시스템 말이지요. 그 안에서 예수님의 틀이 어떻게 대안적인 이야기를 만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이야기가 어떻게 이 세상을 회복하고, 희망이 되는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저자의 열정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대목을 이야기하면서 저자가 <비밀 커리큘럼>이라는 용어를 썼는데요, 원문에는 어떻게 되어있는지 모르겠지만 혹시 Hidden Curriculum을 그렇게 번역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봤습니다. 교육학에서는 <잠재적 교육과정>이라고 하는데 그 개념이 브라이언이 말하는 것과 딱 겹치기 때문입니다. 요지는 교사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학생이 배우는 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사가 가르치고자 의도하는 것보다 학생에게 훨씬 강력하게 흡수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학교가 정한 교육과정보다 이게 더 무섭습니다. 브라이언은 우리 사회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제국의 시선을 배우게 되고 그것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공동체로 바르게 서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도 이런 내재된 커리큘럼이 있어야 된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렇게 해야 교회가 예수님의 희망을 가질 수 있고,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피조세계와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수준의 화목을 도모할 수 있다고 말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생각과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때 더 집중하지요? 이번에 읽은 책의 상당 부분이 평소에 생각하고 고민하는 부분이어서 저야말로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 읽은 브라이언의 첫 번째 책에서 경험했던 유익이 이번에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한 몫 했을 것 같고요. 그런데도 이상하게 읽는 과정에서는 왜지 모르는 불편함이 자주 나타났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저자가 감정적으로 글을 쓴다는 느낌이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작가의 심정을 이해하기는 합니다. 모던 시대의 기독교가 지나치게 사후 종착지에 대해서만 몰두하고 현세의 난무하는 문제들, 사회적인 불의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고 단정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인용문이기는 합니다만 저자는 이것을 “평생 교회 다니면서 딱 하나의 설교만 들었다”는 표현을 쓰더군요. ‘예수 믿고 죄를 용서받고 천국 간다’는 설교를 빗댄 말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이전 생활방식에 갖다 붙인 신념이나 교리가 아니라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는 저자의 신념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응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달하는 방식이 굉장히 냉소적이었다는 점이 거슬렸습니다.
거기에다 성경을 지나치게 상징적으로 보는 관점과 “재림 같은 것은 없다”라고 단정해 버리는 태도나 신학적인 견해를 대할 때는 제 가슴을 한 대 얻어맞고 저만큼 튕겨져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제가 이미 다른 쪽에 서기로 결정했기 때문이겠지만 어쨌거나 그런 점에서는 이번 책이 저를 완전히 설득시키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정의를 실천하고 사람과 사회를 회복시키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절대 공감합니다. 기립박수를 쳐주고 싶을 정도로요. 물론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에 대해서는 여전히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그라시엘라와 그의 딸 레띠시아가 아르헨티나에서 가졌던 경험은 아주 인상적인 사례였다고 생각하는데요... 공동체적으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면 우리에게도 그런 전략들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선명하게 보이는 게 없어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브라이언이 몇 가지를 제안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저에게는 여전히 이상만 펼쳐놓았다는 느낌이어서 아쉽기도 하고요.
그래도 기분 좋은 책읽기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책을 통해서 ‘브라이언 맥클라렌’을 좀 더 많이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저하고 다른 생각이 어떤 건지도 발견했고요. 어떤 사람은 그 ‘다름’이 너무 결정적인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제가 아직은 브라이언을 좋아합니다. 이후에도 그의 책을 좀 더 읽을 생각입니다. 좋은 책을 접하게 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P.S : 주석도 상당히 좋았어요. 그런데 이게 뒤에 붙어서 책읽기가 많이 불편했습니다. 좀 긴 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각주로 처리했으면 읽는 이에게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훌륭한 주석이 어떤 장(章)에서는 상당히 누락되어 있더군요. 25장 같은 경우에요. 이런 건 출판사에 한 마디 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