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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
테리 이글턴 지음, 정영목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월
평점 :

<비극>
테리 이글턴 /을유문화사
이 책은 비평서이기 때문에 언급된 작품들을 다 알지 않고서는 온전히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하물며 어떤 한 시대도 아닌, 고대에서부터 근대까지에 이르는 비극의 예술적, 철학적, 윤리적, 정치적 흐름의 모든 것을 훑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이 책에서 밝히고자 하는 바는 확고하다. 나는 <비극>이 현대에 가지는 의미와 그것이 여전히 필요한 이유에 방점을 찍고 읽었다.
책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철학자는 단연 니체이다. 그 다음은 헤겔, 자크 라캉, 소포클레스, 쇼펜하우어, 칸트, 플라톤 등이고 작품은 <오이디푸스>, 작가로는 셰익스피어와 입센이 대표적으로 언급된다. 저자는 왜 이토록 많은 지식들을 나열했을까?
이글턴은 비극은 “위대한 예술과 가장 근본적인 도덕적. 정치적 쟁점들이 긴밀하게 맞물린 곳”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그가 역사적 이데올로기로부터 비극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한 시도이며 그것은 결국 이 책이 독자들뿐아니라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현실의 비극과 예술적 형태의 비극을 구분한다.
고전적 관점에서 실생활의 참사는 날것 그대로의 고난의 문제이기 때문에 비극적이지 않다. 그런 고난이 예술에 의해 형태가 잡히고 거리가 두어져 어떤 더 깊은 의미가 풀려나올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본격적으로 비극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비극적 예술은 견딜 수 없는 것을 제시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에게 그 견딜 수 없는 것에 관해 사유하고 그것을 기리고 그것을 기억하고 원인을 조사하고 피해자들을 애도하고 그 경험을 일상생활로 흡수하고 그 공포에 의지하여 우리 자신의 약점이나 필멸성과 마주하고 또 가능하다면 그 핵심에서 어떤 잠정적인 긍정의 순간을 발견하도록 권유한다. (p.23-24)
하지만 현대의 삶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겪으면서 영웅적 서사의 비극적 운명이 아닌 개인적이고 개별적이며 딜레마들로 가득하다. 자유주의 사회는 “자기를 완성할 권리”가 절대적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아직 전통적인 윤리를 거부할 수 없다. 사회적 이데올로기나 윤리가 나 자신이 되는 것을 방해할 때, 사회의 선이 나의 선과 충돌할 때, 나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와 대치될 때. 우리의 비극은 영웅의 운명에 비해 하찮게 여겨지는 이중비극의 고뇌를 야기한다. 때문에 현대의 우리에게는 비극의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비극적 주인공의 자격은 무엇인가?
비극적 주인공으로 자격을 갖추기 위해 궁지에 처한 인간이기만 하면 된다. 고결할 필요도 없다. 그런 비참한 상황을 맞이해도 싸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만큼만 고결하면 된다. 비극은, 쇼펜하우어의 표현을 빌리면, 위대한 불행의 우화다. (p.48)
그리고 비극의 역할은 “실존의 잔혹이나 부조리에 관한 이런 구역질 나는 생각들을 감당하며 살 수 있는 관념으로” 바꿔주는 것이다. 이글턴은 “세계는 그렇고 그런 환각일지도 모르지만 예술 (특히 비극)은 구원적 환각”이라고 이야기한다. 니체 또한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진리 때문에 소멸할지도 모른다. 비극은 카타르시스라기보다는 영적 치료제다.”라고 주장했다.
비극적인 것에 대한 이데올로기는 결국은 복구가 불가능한 공격을 맞이한 사람, 결국은 대립물의 통일로 환원될 수 없는 갈등에 사로잡힌 모든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한다 그것은 위로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마땅히 그래야 할 만큼 존중하지 않는다. (p.248)
책의 마지막 문장은 근대 비극 예술의 한계와 그에 대한 저자의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결국 현대의 일상의 비극을 현대 예술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적 진리를 찾아 고전에 다시 눈을 돌릴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 문장은 왜 비극은 죽었다고 이야기하는지 그의 첫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에 충분하다.
이글턴이 설명한 것처럼, 비극 예술은, 바로 지금 그 죽음을 맞았고, 비극의 근친상간적 특성에 따라 그것이 진실이자 환각이며, 눈이 멀게 됨에 따라 현실을 볼 수 있게 되고, 그것의 이행에 따라 비극이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반대로 재탄생을 기대할 수 있다. 즉 비극은 비극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새로운 종류의 자기 이해‘를 통해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비극 예술은 비극적 삶 속의 위로할 수 없는 자들을 구원적 환각을 통해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