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필요한 시간 -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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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다상담>을 쓴 강신주와 <철학이 필요한 시간>의 강신주는 완전 다른 사람같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이 생겨 한번 집어든 책이다. 동서양의 다양한 철학자의 대표작을 가지고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엮어 놓은 것인데 비교적 철학자들의 핵심 사상을 짧게 언급하거나 해석하고 자기 생각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몇 가지 변용을 사용하여 48가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거짓된 인문학은 진통제를 주는데 만족하지만 ... 정직한 인문정신이 건네는 불편한 목소리를 견디어낼수록, 우리는 자신의 삶에 더 직면할 수 있고, 나아가 소망스러운 삶에 대한 꿈도 키울 수 있다는 기본 전제 하에.

좀 아쉬운 것은 철학자들의 사상을 깊이 있게 이해하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인데 좀 집중해서 읽으려고 하면 해당 꼭지는 끝나고 끝나기를 반복하고 있어서 말하다 만다는 느낌이 든다. 김운하의 <카프가의 서재>와 비교가 되는 대목이다. <카프카의 서재>는 (내 취향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리뷰가 취향에 따라 쓰는 것이므로 패쓰~) 충분히 자기 의견을 얘기하면서도 문학작품과 철학을 묵직하게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만족스러운 책이기 때문이다. 또하나 <카프카의 서재>는 작가를 인간적으로 느낄 수 있으나 <철학이 필요한 시간>은 그렇지 않다. 자기를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 대한 끌림이 내게 있나보다. 더 정이 가고 다시 펼쳐보고 싶고 지인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은 <카프카의 서재>이다.

 

읽으면서 울림이 있거나 맘에 들어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을 옮겨 적어 보았다.

 

지금 인생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가 위대한 이유는 현실에 충실하게 살 수밖에 없는 장치가 자기 사상 안에 있다는 것이다. '영원회귀'가 그것인데 삶이 직선으로 끝나는 흔한 서양식 사고방식이 아니라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라는 그의 생각은 (동양식이지. 자랑스럽다. 그러나 변화없는 동일 반복은 아닐 것이다.) 오늘 잠시 굴욕적으로 살면 미래엔 장미빛이 펼쳐지는 게 아니라 그것이 계속 내 삶으로 반복될 것이라는 섬뜩한 경고가 되기도 하는 것이라서 오늘을 당당하고 충실하게 살아가도록 추동하는 강한 동기가 되어 준다.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당신이 소망하는 것인가 -라캉

라캉은 지금 내가 욕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과거 타자가 욕망했던 것, 혹은 금지일 수 있기 때문에 이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자기가 속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남에게 묻지 말고. 남에게 묻는 사람 많이 봤다. 무책임해 보인다. 자기 삶의 주인같지 않다. 이런 질문에 대답해주기 싫고 관심이 가지 않고 귀찮다고 말하는 지운님의 마음이 이해된다.

 

"맑은 거울에는 틀이 없다" -육조단경, 혜능스님.

이 말은 혜능이 신수의 게송을 비판하며 지은 시의 한 구절인데 나는 딱 이 구절에 꽂혔다. 무릎을 친다. 마음의 거울을 닦으려는 데에 강박이 있는 신수를 비판하고 그것을 뛰어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혜능. 그가 선불교의 여섯번째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인 것은 참으로 다행이구나.

 

원 스토리는 이렇다.

 

이 몸이 바로 보리수

마음은 맑은 거울

날마다 힘써 깨끗이 닦아야 하리라

먼지가 앉지 않도록

 

이라고 신수가 게송을 지었다. 스승 홍인이 선불교의 다섯번째 스승이었고, 여섯번째 스승이 될 제자를 고르는 중이었다. 나무하느라 해가 진 뒤 늦게 돌아온 혜능이 신수의 시를 보고 이렇게 시를 짓는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며

맑은 거울에는 틀이 없다

본래 아무 것도 없는데

어디에 먼지가 모이겠는가

 

신수가 보는 것은 마음 자체가 아니라 먼지이다. 그래서 먼지가 없게 깨끗이 거울을 닦는 것에 강박을 갖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인데 집착은 우리 자신을 고통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고통에 빠진 타인에 무관심하도록 만든다고 한다. 후자가 더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우리가 무엇인가에 몰입하고 있을 때, 자신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타자가 방치된 채 시들어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잘 새겨놓고 싶다.  

 

 

역린이야기

 

군주에게 간언하고 유세하며 합당한 논의를 설명하려는 지식인은 애증을 가진 군주를 살핀 뒤에 유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릇 용이란 짐승은 길들여서 탈 수 있다. 그렇지만 용의 목 아래에는 지름이 한 척 정도 되는 거꾸로 배열된 비늘, 즉 역린鱗이 있다. 만일 사람이 그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용은 그 사람을 죽이고 만다. 군주에게도 마찬가지로 역린이란 것이 있다. 설득하는 자가 능히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 설득을 기대할 만하다.

- 한비자, 세난(說難)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역린이 있기 마련이다.' '논리적으로 정당화된 생각만으로 상대방을 실제로 움직이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무의식적 정서, 즉 상대방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상대방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읽을 수 있는 타자에 대한 감수성이다' '상대방을 실제로 움직이도록 할 수 없는 이유는 나의 이야기가 그의 역린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비판적이고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은 상대방의 역린을 읽을 수 있는 수사학적 감수성이 없다면 빛을 발할 수 없는 법이다'

 

자기의 역린을 건드렸다고 상대의 비판과 논리가 맞는데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태도를 갖는 사람은 좀 쪼잔한 거 아닌가? 그런 사람에게서 성장을 기대할 수 있을까? 중요한 건 세상에는 대범하고 품이 큰 사람보다는 쪼잔하고 소심한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다. 그것때문에 내가 이 말에 주목하는거지. 쩝.

원래는 한비자가 군주를 설득하고자 하다가 한 말이지만 말의 영향력을 생각하는 누구나가 생각해 볼 만한 내용인 것 같다.

 

논리적 사유

나로부터 이성의 능력을 강제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기보다 타자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논리적 사유란 타자를 폭력이 아닌 평화스러운 방법으로 설득하려는 의지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기계적으로 보이지만, 논리적 사유는 타자를 대화 상대자로 인정하고 배려하는 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

 

이 문장을 보고 무척 반가웠다.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에 대한 타인의 느낌은 차갑고 냉철하고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기타 등등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친밀하게 관계맺는 데에 있어서 많은 장애를 갖고 있는 게 사실이고 그 장애를 넘어보려고 부단히 애를 썼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상대에 대한 인정(나는 존중이라고 하고 싶다)과 배려를 그 누구보다 하고 있다는 사실, 누구못지 않은 따뜻함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나 스스로가 확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반가운 문장이 하나 더 있다.

 

"사랑 경험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새로운 타자와 새롭게 사랑에 빠질 때 지금까지의 경험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의 애인은 과거의 애인과 확연히 다른 사람이고 자신도 과거와는 다르게 변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과거 사랑 경험이 새로운 사랑을 꾸려가려는 데 장애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피상적으로 관계를 유지할 때 사랑의 경험은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타자를 더 깊이 사랑하며 알아가려고 할 때, 과거 경험에 의존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왜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얘기했는지는 차치하고서 '지금까지의 경험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단언하는 부분이 나는 반갑고, '타자를 더 깊이 사랑하며 알아가려고 할 때, 과거 경험에 의존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말도 아주 아주 맘에 든다. 다만 타자를 더 깊이 사랑하며 알아가려고 할 때 타자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끊임없이 '상대를 보는' 것이기를 바랄 뿐. 아직도 나는 독백하고 있고 '아직'도 라는 말을 쓰는 나는 나에 대한 높은 '기대'를 걸고 있고 그 기대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니까.
 
벽 속에 살면서 자유로운 걸로 착각하고 살고 있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인 것인지...
 
사람들은 어리거나 나이가 들었거나 자유를 향한 의지를 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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