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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칼이 되어줘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김진석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당신은 나를 모릅니다. 지금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나 역시 나 자신을 잘 알진 못해요. 편지는 쓰지 않으려고 했어요. 정말이에요. 이틀 동안 애를 썼는데 이젠 결심이 꺾이고 말았군요.’
이와 같은 말로 시작되는 편지를 낯선 이에게 받는다면?
이 책은 2017년 맨부커 인터내셔널 수상 작가이자 이스라엘 현대문학의 거장, 다비드 그로스만의 <나의 칼이 되어줘>이다. 총 3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와 2부는 등장인물인 미리엄과 야이르가 주고 받은 편지글이 나오고, 3부는 이들이 재회하는 내용이 나온다. 약 500페이지에 가까운 꽤 두꺼운 책인데, 무려 336쪽까지가 야이르가 미리엄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어떤 사연인가 하니, 야이르는 동창회에서 우연히 본 미리엄에게 반해버렸고, 그녀를 잊지 못하고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야이르가 편지를 통해 내는 목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조급한 것 같으면서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하나하나 꺼낸다.
‘나로선 우리가 낯선 사이라는 점이 전혀 두렵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예요. 말해보세요, 아주 중요한-가장 귀중한-어떤 것, 비밀이나 약점, 혹은 내가 당신에게 제안한 것 같은 그런 완전히 황당한 요구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털어놓고, 그 처분을 철저히 내맡기는 것만큼 매혹적이고 도발적인 일이 있을까요?’
‘그래서 난 이제 눈을 질끈 감고 재빨리 써내려갈 거예요. 완전히 낯선 두 사람이 그 낯섦 자체를, 이질성이라는 강력하고 뿌리 깊은 원칙을, 우리 영혼에 깊숙이 자리 잡은 모든 비대한 권력들을 극복하게 해달라고요.’
‘나의 칼이 되어주세요. 그럼 맹세코 나도 당신의 칼이 되어줄게요. 예리하지만 연민이 깃든, 내 것이 아닌 당신의 단어들로요. 그토록 섬세하고 부드러운 어투와, 껍질마저 벗어버린 것 같은 말이 세상에 허락된 줄 난 미처 몰랐거든요.’
사실 두 사람은 각각 아내와 남편이 있는 상태다. 엄밀히 말하면 불륜인 것이다. 그럼에도 둘의 관계를 응원하게 된 독자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떠올랐다.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속 프란체스카는 한 남매를 둔 어머니이자 리차드의 아내이다. 그녀를 제외한 가족이 집을 떠날 기회가 생기고, 프란체스카는 4일 동안 집에 혼자 남겨진다. 그때 행인이었던 사진작가 로버트가 우연히 프란체스카 집 앞에 멈추게 되고. 프란체스카는 그에게 길을 알려주다가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두 작품 모두 대다수의 사람이 지양하는 불륜을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잔함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힘이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수식어를 제외한 채, 두 사람만 남은 상태에서 존재하는 사랑을 두고 바로 위대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일까?
<나의 칼이 되어줘>는 나에게 읽기 힘든 작품이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을 꼽자면 편지글로 된 형식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만 보내는 약 300페이지에 가까운 남자의 편지, 그리고 그 내용을 살펴보면 지나치게 솔직하다. 굉장히 다양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안함과 광기, 집착도 엿볼 수도 있다. 처음에는 편지를 보내게 된 사연과 미리엄에게 품은 마음이 궁금해서 흥미로웠고, 읽으면서 예사롭지 않은 표현들이 눈에 띄어 매번 감탄하였다. 하지만 읽을수록 점점 부담스러웠다. 누군가의 마음을 깊게, 또 오래 들여다본 느낌이라 몇 페이지만 읽어도 지치게 되었다. 이것은 내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더 안 좋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총 4장으로, 꽤 긴 편지였다. 하지만 나는 감동보다도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를 한 번 보았다고(실제로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를 몇 번 더 봤다고 했다) 이렇게까지 온갖 미사여구를 붙이면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또 내가 이 사람에게 어떠한 확신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도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 <나의 칼이 되어줘>라는 책을 읽었을 때도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그때 받았던 편지와 겹쳐져서 끝까지 붙잡고 읽기 힘들었다. 누군가를 향한 진심은 로맨틱하고 소중하게 그려진다. 그런데 그 진심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섞여있다. 다른 누구에게는 말할 수 없는 나의 과거와 철학들 따위가 담겨 있다. 절실한 열정은 누군가에게는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칼이 되어줘>는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책임에는 분명하다. 편지글 형식으로 주고받는 그들의 진심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다가갈지 궁금하다. 꼭 읽어보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