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속성은 그자신이 책이 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애서가들의 귀에 속삭인다.
나를 써보지 않겠어?

글을 깨친 뒤로 내게 세상을 열어준 것은 파일이 아니라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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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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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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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곧 무언가를하기 위한 도구를 얻는 것이라는 실용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외국어 공부도 얼마든지 그 자체가 목표인 공부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인문계 학교들의 교육 목표는 고대그리스 로마에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인문교육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인문교육의 전통은 흔히 교양과목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자유학문liberal arts의 교육과 이어지는데, 여기서 자유라는 말이 붙은 것은 이것이 직업인이 기능을익히는 훈련이 아닌 자유 시민의 소양에 필요한교육이었기 때문이다. 교양교육, 전인교육 등과도 통하는 이런 교육 방식은 현대적으로 보자면 자유 시민에게 필요한 인문교육인 셈이다.
여기에서 핵심은 기능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즉 어떤 실용적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 자체가 목적인 공부다.

굳이 목표를 제시하자면 인간을 배우고인간이 되기 위한 공부일 뿐이다. 인문학의 대상으로서의 외국어와 실용적인 도구로서의 외국어를 기본적인 수준에서 구분하여 생각하지않는다면 지금과 마찬가지로 양쪽 다 제대로못 챙기기 십상일 것이다.

사실 인간의 일상생활의 핵심을 이룬다는면에서 언어만큼 실용적인 도구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인간의 도구인 동시에 인간의 본질이다. 그렇기에 언어가 인문학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외국어를 공부할 때는, 글로 쓴 번역이라는 외적인 틀을 갖추지 않는다 해도, 우리 내부에서 모어와 외국어가 끊임없이 교섭을 하는데, 사실이것이 외국어를 공부하는 핵심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즉 두 개의 언어가 서로 맞닿는 순간두 언어 사이의 본질적 유사성과 흥미로운 차이들이 드러나고,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인간들의 본질과 차이와 관계, 그리고 둘을 넘어선 제3의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된다.
번역은 이 과정을 관장하는 작업이고 그 자체로 인간적인 즐거움을 주는 작업이며, 그렇기에인문학적 작업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혼자, 때로는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해보는 번역 작업에서 인간적 즐거움을느끼듯이, 전문가가 공을 들여 해놓은 번역 자체에서도 두 언어가 뒤엉키고 새로운 가능성들이 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즐거움을 느낄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은 서로 다른 인간들의 본질적인 교섭 과정을 살펴보며 인간을 공부하는 중요한 작업 아닐까? 여기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어야만 번역의 진정한 자리를 찾는 것이 가능해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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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언어와 문화 교류의 환경이 바뀐상황에서도 이것이 유효할까? 그 답으로 이런예는 어떨까? 과학을 포함한 문화의 모든 부분은 계속 발전하고 있고 그것은 새로운 언어, 새로운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런 언어나 개념, 또 그 발전 과정을 우리 언어로 번역한다는것은 물론 외래어의 범람을 막는다는 면에서도중요하고 또 외국어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소개한다는 면에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발전 과정을 우리 언어로 재구성해보고 소화해내면서 현재 우리가 가진 것과 연결해나간다는면에서도 중요하다. 근대에 우리에게 쏟아져들어온 서양문물을 표현하는 언어들이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일본어의 한자어를 통해 우리에게 소개되었다는 것은 신창순의 『국어근대

표기법의 전개」(태학사, 2007)나 최근 발간된 이한섭의 『일본어에서 온 우리말 사전』(고려대학교출판부, 2014)이 잘 보여주고 있다. 반면 일본이 긴 기간에 걸친 그들 나름의 힘겨운 번역 과정을 통해 ‘사회‘ ‘개인‘ ‘자유‘ ‘권리‘ 등의 말을얻어냈다는 사실은 야나부 아키라의 『번역어의성립』(마음산책, 2011)이 잘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일본에서 수입된 언어를 중간에 놓지않고 기왕에 우리말에 외래어처럼 자리잡은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이제부터라도 직접우리 언어로 외국어를 번역해내겠다고 노력한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사실 외국문학에서도 일본어 중역을 벗어난 것이 그리 오래되지않은 일 아닌가.

그러나 외국의 문화나 사회의 새로운 언어와개념을 번역해내는 것이 단순히 거기에 딱 맞는 우리말을 발견해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현실이나 역사에, 또는 아직 우리 사고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나 바로 그런 어색하고 낯설고 생경한 면을 통해 우리의 현실 속에 어떤 것이 없음을 알려주고, 또 바깥에서 온 언어가 우리의현실과 어딘가 어긋나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번역의 역할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 번역의 언어가 우리말로 자연스럽게 녹아든다면 그것은 단지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의변화가 언어를 감당해낼 만한 상황에 이르렀기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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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의미는 텍스트를 읽어가는 과정에서 어떤 상호작용 가운데 동적으로 형성되어 나아가는 것이고, 그나마도 끊임없이 흔들린다. 번역가가 이런 의미 형성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번역 과정에서 두 언어의 차이를 고려하는 과제 못지않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말할 필요도 없다.
원문의 표현 또한 그 의미의 원형을 아슬아슬하게 순간적으로 고정시켜놓은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불필요한 부자연스러움을 자랑할 수야 없지만, 번역가가 원문 텍스트의 의미를 형성해나가는 과정에서 얻은 결과물이 목표 언어의 규범적 표현법으로 감당하기 쉽지 않다면, 또는 그렇게 할 경우 손실이 너무 크다면, 그때 나타나는 일탈적 표현들은 오히려 목표 언어의 표현력을 확대하는 부분으로볼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번역가의 작업을 완성시키는 것은 여러 개의 언어를 통합하여 하나의 진정한 언어를 형성하려는 위대한 모티프이다." (발터 베냐민, 번역가의 과제」『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번역가의 과제 외』, 길, 2008)

어쨌든 베냐민의 이야기를 받아들인다면 번역가의 과제는 완전한 ‘번역‘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언어‘에 이르는 것이다.

이렇게 출발언어의 불완전성을 인식하면번역가가 그 언어를 읽어나가며 의미를 적극적으로 형성해가는 입장에 설 수 있고, 그와 함께출발과 도착이라는 표현이 전제하는 일방통행성과 수동적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언어의불완전성이라는 말 자체가 말하는 사람의 의도가 언어로 완전하게 표현될 수 없다는 뜻을 포함하며, 번역은 양 언어의 통합을 통해 완전한언어로 나아가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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