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Sergei Eisenstein: Double Feature : Battleship Potemkin & Strike (전함 포템킨&스트라이크) (한글무자막)(Blu-ray) (2012)
Kino Video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심야에 연달아 두편의 영화를 보았다. 하나는 전함 포템킨 하나는 택시드라이버였다. 예전에 전함 포템킨을 보았을 때, 굉장히 지루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러시아의 시대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후 러시아문학을 공부했고 러시아에 대해 대강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보았는데도 별로 였다. 역시 선전영화는 허풍이 과하다.

이번에 보았을 때 영화속 압도적인 긴장감에 깜짝 놀랐다. 이런 영화였구나 이 영화가, 놀라웠다.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영화적인 측면으로 살펴보았을 때 굉장히 박력있었다. 이미 이 시대에 현대의 컷편집을 거의 그대로 구현(빠른 교차편집, 컷사이즈의 밸런스, 한폭 한폭의 미장센의 의미, 컷의 리듬감)할 뿐만 아니라 별다른 스토리없이 장면만으로 관객의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영상을 선보이고 있었다. 특히, 2장에서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대치하고 있는 상황, 갈등이 폭발하기 직전에 몰려드는 긴장감과 조마조마함, 그리고 반란의 성공의 쾌감이 전해진다. 또, 오데사의 계단 역시 영화사 명장면 답게 그 처절함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레닌의 안목은 틀린게 아니었다. 영화라는 매체는 굉장했다. 이 영화의 출현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 안에는 이미 스토리를 떠난 영상 하나 하나의 연결이 관객의 마음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논리라는 것은 정교한 작법을 만들어 낸다. 쇼트와 쇼트가 부딪힐때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 그것이 새로운 '정'이 되고 그것과 다른 '반'이 부딪혀 '합'을 이룬다. 영화속에서 이루어진 논리가 수학적으로 계산되어 딱딱 맞아 떨어지고 감독이 의도하는 그대로의 것을 관객에게 전해진다. 그래서 영화는 다른 것들에 비해 역동적이다. (영상은 언어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모든 것을 고려한 치밀한 구성이 없으면 감독의 의도와 전혀 다른 것을 관객은 느끼게 된다. 어설픈 감독은 그래서 이걸 의도했는데라고 변명하는 부류다. 영화는 그 영화 한편으로 관객에게 자신이 연출한 지점을 정확히 전해야한다.) 이 논리와 작법이 발전해 장르영화의 토대를 제공하지 않았을까 싶다. 관객은 어떤 장면을 보고만 있어도 동일하게 비슷한 지점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긴장감을 느끼기 때문이다.(정확하게 전달한다. 이미 그 안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논리가 숨어있다.) 그 반대편의 영화이론들 역시 아이젠슈타인의 몽타쥬를 비판하기도 하지만(대표적으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관객에게 다른 의도로 해석될 수 없는 몽타쥬이론이 영화의 진정한 의미를 훼손한다고 했다. 그는 '시적감흥'이라는 것을 주창했는데 그것은 관객이 영화속 장면들을 통해 스스로 해석하고 스스로 받아들이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매체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동시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몽타쥬라는 기본이 없었다면 타르코프스키가 이야기한 주장 역시, 연속되는 이미지의 부딪힘이라는 전제가 사라져 버린다. 전함 포템킨이 의미있는 이유다.

 

이에 비해 아직 영화라는 매체가 연극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소제목이 붙어 있는 것은 마치 1막, 2막의 연극처럼 구성된 커다란 시퀀스 덩어리를 의미했다. 그 장소에서 벗어나지도 않는다. 연극처럼 그 무대 위에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이다.(이미 편집으로 공간과 시간의 한계를 극복했는데도 말이다.) 아직 현대 영화처럼 엄청나게 많은 씬들이 왔다갔다하는 식의 구성까지 갈 수 있는 복잡한 플롯의 구현은 힘들어 보이지만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필름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재미있었다. 영화가 이렇게 많은 것들을 전해주는 것은 참 오래간만이다. 아직도 이 영화에 미치지 못하는 영화가 얼마나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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