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이슬아 수필집
이슬아 지음 / 헤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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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너무 순수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새벽의 하얀 눈 같은 수필이라고 생각했다.
애써 포장하지 않은 글.
그 글들이 너무 아름답고 재미있고 또 한 편으로는 아린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이슬아 작가 본인이자, 친구이자, 가족이 된 것 같은 신기한 경험을 했다.
혼자 큭큭대며 웃기도 하고, 별안간 찡해져 울기도 했다.

다만, 책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뭔가 힘이 부치는 느낌이어서 아쉬웠다.
매일 매일 글 한 편씩을 어떻게든 써내야하는 한계에 다다른 것이었을까?
그래도 담아두고 싶은 문장들도 많았고, 6개월이나 매일 글을 써낸 작가의 끈기와 집념이 정말 대단한 것 같다.
글쓰는 직업의 하얀 바탕을 마주한 고통, 마감의 초조함, 빠듯한 수입이 느껴졌다.

이슬아 작가의 글이 참 좋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귀 기울이고, 관찰하고, 질문하여 사소한 일상도 특별한 에피소드로 만들고, 한 편의 글로 담아내는 작가인 것 같다.

재롱잔치 때 내가 움직일 수 없었던 이유는 온 세상에게 내 실수를 들킨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자라면서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다. 온 세상은 내게 딱히 관심이 없다는 것을. 내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과 동물과 장소 등은 사실 아주 적었다. 세상의 극히 일부여서 오히려 외로울 지경이었다. - P132

나의 글쓰기 스승들 중 한 분이 그랬어. ‘작가는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준비하는 사람‘이라고. - P151

통증을 참으며 그저 가만히 있다 보니 그런 것들이 기억나서, 소파에 누운 채로 요즘의 평안들을 나열한다. 별 탈 없던 나날들이 오늘처럼 별 탈 있는 날을 지탱하는 것 같다. - P308

아직 내가 되어보지 않은 나이를 먼저 살고 계신 선생님들 사이에 앉아 말과 글을 듣고 있다 보면 삶을 예습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꼭 지혜의 엑기스를 속성으로 전달받는 것 같았다. - P310

글쓰기는 가끔 잔인할 만큼 너무도 혼자의 일인 것 같다. 어떤 수를 써도 결국 혼자 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 시작을 서로에게 기댈 수는 있단 걸 알겠다. 우리는 모두 게으르거나 쓸쓸하거나 나약하기도 하여서 뭔가를 혼자서는 시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P313

우리는 가족이어도 서로의 마음 속에 어떤 지옥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 지나갈 때가 많았다. 잘 지내는지, 아프거나 슬프지는 않은지 궁금해하면서도 다 물어보거나 다 말해보지 못했다. 오랜만에 만나 긴 이야기를 하면 새삼 놀랄 뿐이었다. 그랬구나, 세상에, 그런 일이 너에게 있었구나, 하고 몇 발짝 늦게 알아주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마음을 다해 듣는대도 대부분의 문제들은 철저히 각자의 몫으로 남기 때문이다. - P340

타인의 슬픔을 슬픔으로, 타인의 기쁨을 기쁨으로 느끼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면 그건 영혼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일이랬다. 축하와 밥과 술을 듬뿍 나눈 오늘 나는 영혼에 대해 생각하며 혼자 밤을 보낸다. 충만함이 공포를 이긴 밤이다. - P341

나를 포함하지 않는 풍경. 나를 포함하지 않는 삶. 나를 포함하지 않는 국가와 지역. 나를 포함하지 않는 계층과 풍요. 나를 포함하지 않는 자유와 존중. 그것에 대한 분노와 슬픔. 혹은 그것조차 되지 못해서 쌓이는 우울. 제네바에서 산책해보지 않았다면 나는 그 우울을 개인 탓으로 돌리는 사람으로 남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 P380

쓰거나 고쳐서 완성해야 할 글이 있는 삶과 없는 삶은 조금 달랐다. 글을 쓰는 건 고된 일이지만 자신의 쓸모를 찾는 데에 도움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쓰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각자 고유한 사람들임을 잠깐 기억해냈다. - P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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