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미래 - 반종교와 무신론을 넘어서 대우휴먼사이언스 1
이태하 지음 / 아카넷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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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내용을 독자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좋은 방법은 그 책을 비판적으로 읽는 것입니다. 저자의 말에 의문을 제기하며 읽는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주장은 무엇인지, 숨겨진 전제는 없는지, 주장에 대한 근거는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 근거와 주장이 타당하게 연결되었는지 등을 검토하여 저자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동의를 표하는 것. 이것이 대략적인 비판적 읽기입니다. 저자가 하는 말이 상식처럼 보이고, 평소 당연하다고 여겼거나 자신의 가치관과 부합하는 것이더라도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예민하게 책을 읽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 단어는 평소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로 쓰인 걸까?’, ‘이 주장이 내 생각하고 같긴 한데 과연 이러한 방식으로 정당화 될 수 있을까?’ 등의 의문을 의도적으로 제기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저자가 책에서 하고 있는 말은 저자 스스로 이미 많은 시간 고민했던 것입니다. 나름대로의 정당한 논리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저자의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따라가게 되면 독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주장에 동의하게 되는 일이 생깁니다. 『종교의 미래』에도 그러한 소지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 가지 사항을 대략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저자는 2장의 1절에서 주커먼의 주장을 언급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주커먼은 종교가 선한 사회의 필수 요소가 아니라고 말합니다(56쪽 참조). 이에 대해 저자는 세 가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주커먼의 조사 결과를 신뢰하기에는 조사 대상인 149명이 적은 숫자라는 것, 지금의 이상적 사회[흔히 말하는 북유럽의 복지국가]를 건설하는데 종교[저자는 이 종교가 기독교라고 말합니다]의 역할이 있었을 것, 종교의 교리는 경건한 삶의 실천인데 스칸디나비아의 시민들이야말로 이웃사랑을 실천하니 말로만 믿는 사람들보다 더 종교적인 사람이라는 것 등입니다. 이러한 반박에 대해서는 재반박이 가능합니다.

우선, 조사 대상이 몇 명이어야 그 결과를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인터뷰 방식이 어떠했는가에 따라 149명은 충분한 표본이 될 수 있습니다. 몇 명을 인터뷰했는가보다 어떻게 인터뷰했는가의 문제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종교가 이상국가 건설에 일정한 역할을 끼쳤을 것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답변이 가능합니다. ‘그렇다’ 또는 ‘아니다’에서부터 ‘그렇기는 하지만 그 영향은 부정적이었다’는 답변도 가능합니다. 저자는 종교를 둘러싼 전쟁을 다룰 때면 그것이 종교 자체에는 포함되지 않는 부수적 현상인 것처럼 언급합니다. 그러나 저는 종교 간 발생하는 갈등은 종교의 본질인 배타성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국가 건설에 종교가 영향을 끼쳤는가의 문제는 역사적 자료에 대한 해석과 역사관에 따라 달리 이야기될 문제입니다.

저자는 스칸디나비아의 시민들에게서 관찰할 수 있는 관습과 제도가 종교적인 것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들 국가에 종교가 없다고 말할 수 없음을 주장합니다. (저자가 말하고 있듯) 주커먼에 따르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관습일 뿐입니다. 저는 주커먼의 이러한 해석에 동의합니다. 저자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적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을 뿐이지 어떤 초월적 존재는 믿고 있는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 저자의 추측입니다. 그들은 초월적 존재자를 믿기에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스칸디나비아의 시민들이 선한 삶을 사는 것과 저자가 규정한 종교적 삶을 동일시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친절하거나 스스로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종교인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이 따르는 사회적 규약, 윤리, 제도의 형성을 설명하기 위해 종교를 끌어들여야 할 당위는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자는 스칸디나비아의 시민들이 진정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지 묻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자신의 삶에 대해 반성적 성찰을 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습니다(61쪽). 그가 보기에 스칸디나비아의 시민들은 “그저” 그들의 문화와 관습에 따라 봉사활동을 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그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반성적 성찰을 하지 않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반성의 계기가 될 고난도 없었고 문명과 복지의 혜택을 누리기에 그들 대부분은 삶의 궁극적 의미에 대해 진지한 관심과 깊은 성찰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우선 우리가 관습에 따라 산다고 해서 그것이 반성 없는 삶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안에서 관습 자체에 대한 반성, 수정, 보완 등이 일어날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삶에 고난이 없었는지, 그들이 자신들의 삶에 진지한 성찰을 하지 않는지 등의 문제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이곳에서 저자는 주커먼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다소 무리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자의 주장과 의도를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차후 다시 한 번 읽어보려 합니다.]

저자는 도킨스, 허친스, 해리스 등을 이 시대의 대표적 무신론자로 규정합니다. 이들에 대한 비판은 저자가 이 책을 지은 주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이들은 “인간의 본능과 종교의 본질에 대한 이 같은[종교가 삶의 무의미에서 벗어나 희망을 갖게 해준다는 것과 같은] 이해가 부족”합니다. 저는 인간에게 본능이라는 것이 있는지, 그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모릅니다. 저는 본능이라는 것을 허구적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현대의 인간이 스스로의 유한성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합니다.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에 귀의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일정 부분 동의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한성 때문에 모든 인간이 두려움을 느끼지도 않으며, 두려움에 의해 모든 인간이 종교를 갖는 것도 아닙니다. 앞서 저자가 제시한 학자들은 물리주의적 입장에서 세상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 합니다. 인간의 영혼, 자아 등도 뇌의 작용에 의해 형성된 개념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체계 속에서 신의 실존이 부정되는 것은 그들의 이론 체계 내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한 입장을 무식하다거나 유치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그들이 어떻게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해를 차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샘 해리스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그의 이론 체계 내에서는 합리적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논의의 입각점 자체가 다릅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을 이해했느냐 못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자는 이성으로써 종교를 몰아낸다면 그 자리에는 인간의 욕망이 들어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도덕이 전혀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국가가 들어설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196쪽). 이런 주장은 종교에 대한 과도한 신뢰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저자는 기독교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합니다. 저자는 인간의 욕망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보고 있으며, 종교가 국가의 도덕적 해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인 것처럼 말합니다. 저는 인간의 욕망을 부정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종교의 교리는 아니었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선과 악을 나누고 금욕을 강조하는 것. 그러한 종교 자체가 사라진다면 우리의 선과 악에 대한 체계도 변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닌지, 인간의 욕망을 방종으로 몰아가는 것이 과연 옳은 주장인지 의문입니다.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지적 호기심도 일종의 ‘욕망’이라면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지 못하게 종교적으로 제재하는 것이 인간을 위해 올바른 것이기만 할지 의문입니다. 국가의 도덕성은 종교의 유무와 무관합니다. 가령, 우리나라는 법치국가입니다. 우리나라의 사회적 윤리를 지지하는 것은 법의 힘이지 종교의 힘이 아닙니다. 그에 대해 종교가 긍정적 역할을 할 수는 있습니다. 어떤 국가에 도덕적 해이가 발생했다면 그것은 종교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다스릴만한 사회적, 정치적 합리성이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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