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The Power
나오미 앨더만 지음, 정지현 옮김 / 민음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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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니 아주 오래전, 아마도 10년도 더 전에 읽었던 소설책이 떠올랐다. 오래되어 책의 자세한 줄거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몇몇 충격적인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소설의 배경은 1946년에서 1954년에 있었던 프랑스-베트남 전쟁(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 독립 전쟁)이었다. 평범한 프랑스인이었던 주인공은 베트남 파병 후 전쟁의 참화 속에서 점점 미쳐간다. 무기도 없는 힘없는 마을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는가 하면, 어린 소녀와 임신부를 강간하는 것도 모자라 시간(屍姦)... 즉 머리 없는 여성의 시체를 간음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저자는 점점 미쳐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전쟁의 비인간성과 폭력성, 야만적인 면을 폭로한 것이리라.


이 책 덕분에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국가 간의 전쟁이든, 국가 내의 전쟁인 내전이든, 그 어떤 전쟁이든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힘의 불균형, 불안과 공포, 죽음에의 두려움은 인간을 극한으로 몰아붙이고, 이런 상황 속에서 강자든 약자든 모두가 '패배한 존재'가 된다. 전쟁에서 승자가 있을 수 있을까. 승리한 나라는 있을지 몰라도, 승리한 사람은 없다.




나오미 앨더만의 『파워』를 읽고 아주 예전에 읽었던 프랑스 소설책이 떠오른 이유는... '힘을 가진 자와 힘이 없는 자의 관계가 역전되어도 힘의 불균형이 존재하는 한, 세상은 여전히 불합리하고 인권유린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선 『파워』의 줄거리는 대략 이러하다.


{가모장제 사회}가 완전히 뿌리를 내린 현대, 남류 소설가 '닐'은 문단 권력자 '나오미'에게 자신이 쓴 소설을 한 편 보낸다. 닐의 소설 배경은, 아직 여성에게 힘이 없던 수천 년 전이다. 이때만 해도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피지컬적으로 약했기 때문에 '남성 의존적' 삶을 살고 있었다. 사회 고위층은 남성들로만 채워졌고, 중동 지역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완전히 종속되어 있었으며, 동유럽에 위치한 '몰도바'에서는 여성들이 순전히 남성의 성 노리개를 위해서 인신매매가 극성이던 시기.


그러던 어느 날, 나이 어린 소녀들부터 시작해 점점 나이 든 여성들의 손에서 '전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어깨에 있는 '타래'라는 것 덕분인데 간단히 말해서 '전기뱀장어'가 전기를 만들어 다른 생물체에게 충격을 가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여성들에게 '전기', 즉 power가 생기면서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역전된다. (나오미 앨더만은 'power'를 중의적 의미로 사용한 듯하다. 이 책에서 power는 '전기'와 '힘', '권력' 모두를 포괄한다)


그동안 여성에게 억압적이었던 중동 지역 국가와 인도에서는 여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하고, 국가를 전복시킨다. 그리고 온실 속의 화초 같았던 영부인은 대통령인 남편을 죽이고 여성만의 공화국을 세운다. 이 공화국의 군대는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여군들은 아까 프랑스 소설 속 군인이 했던 것과 똑같은 행동을 한다. 난민촌에 습격해 반반하게 생긴 남자들을 골라 옷을 벗기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강간한 후에 죽인다(전기 충격을 가해 죽이는데, 피해자의 몸은 활처럼 뒤집어지고 경직된 채로 죽는데 참혹하기 그지없다). 동료 (여)군인들은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농담을 하거나 시시덕거리며 웃는데, 이런 행동들은 기존 전쟁과 약탈 속에서 남자 군인에 의해 자행되었던 비인간적인 행동과 동일했다.


'여성이 그럴 리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몇 년 전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있었던 수감자 학대 사건을 보면, 미국 여군들도 이슬람 수감자들에 대한 고문, 잔혹 행위에 적극 가담했다고 알려져 있다(나체로 있는 피해자 옆에서 해맑게 웃으며 찍은 사진들이 인터넷상에 상당히 많다). 결국, 성별 그 자체의 문제이라기보다는 권력과 힘의 불균형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오미 앨더만의 『파워』는 페미니즘 문학에 국한하지 않고, 이 범주를 뛰어넘는다. 단순히 '성별'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문제는 '힘의 불균형'이라고 보여준다. 힘을 가진 자가 힘없는 자를 괴롭히고, 약탈하고, 희롱을 일삼는 것은 남성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힘을 가진 사람이라면 성별을 떠나서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고 또 한편의 소설이 떠올랐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와 『증언들』이다. 나오미 앨더만의 『파워』는 여성과 남성의 역전 관계를 보여주며 이 세상의 불합리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반해서,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는 여성이 억압받는 사회를 극한의 모습으로까지 밀고 가 이 세상의 불합리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증언들』에서 권력의 핵심 조력자('리디아 아주머니')가 기존 권력과 조직을 붕괴시키고, 세상을 전복시킨다.


얼핏 보면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와 『증언들』 그리고 나오미 앨더만의 『파워』는 성별의 문제를 다룬 소설로 비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권력의 불균형 문제'를 다룬 수작인 것이다. 좋은 작품은 이렇게 현시대의 권력 불균형, 사회 구조의 불합리한 모습을 보여준다.



나오미 앨더만의 『파워』을 읽고 한동안 머리가 얼얼했다. 완독한 지 며칠 됐는데 그래서 이제야 서평을 쓴다. 책을 읽고 난 후 생각은 생각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생각은 의문을 낳았으며, 의문은 답을 찾아 나서도록 나를 이끌었다. 아직 그 답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답을 찾아서 헤매고 있다. 얼얼, 얼떨떨.


'좋은 세상'이란 어떤 세상일까, '균형 잡힌 권력'이란? '우리가 목표로 해야 하는 바람직한 사회'는?!! 스스로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하는 책, 나오미 앨더만의 『파워』였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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