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 이야기 그래픽 노블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르네 놀트 그림,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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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마거릿 애트우드로 예상했었다. 특히 미투 파동으로 한 해 건너뛰었던 작년 수상자로 마거릿 애트우드가 딱 적임자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폴란드의 올가 토카르추크!! (팔자는 타고난다던데 올가 토카르추크를 보면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상복 하나는 기가 막히게 타고났다. 데뷔작부터 상, 상, 상이다. 작년도 따지고 보면 맨부커와 노벨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한 거였다)


어쨌든 올해 나의 예상은 틀렸지만, 마거릿 애트우드가 올가 토카르추크만큼 상복만 좀 더 타고났다면, 언제 노벨문학상을 받아도 전혀 손색없을 작가다. 다만 한림원 사람들이 대륙별, 국가별로 골고루 나누어 주는 성향 때문에(이것도 박애주의?!) 아마도 2013년에 먼저 같은 캐나다 작가인 앨리스 먼로에게 상을 줬기 때문에 아직 마거릿 애트우드에게 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나 보다(앨리스 먼로의 작품도 좋다. 추천 추천!!).




이 작품은 1985년 작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를 그래픽 노블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원작이 두툼한 소설인데, 그럼에도 원작 이야기가 그래픽 노블에 빠짐없이 거의 다 들어있는 느낌이다. 길고 긴 장편 소설을 '그림'과 '간단한 문장', '대화'로 옮기려면 필히 많은 부분을 가지치기 했어야 했을 텐데 가지치기 한 부분을 잘 모르겠다. 그만큼 그림의 구성이나 표현이 좋고, 문장들도 꼭 필요한 것들만 발췌했다. 그래픽 노블 작가인 르네 놀트가 원작 작가만큼이나 원작을 잘 이해하고, 치밀하게 구상, 구성, 표현했기 때문이리라. 물론 독자마다 느끼는 바 조금씩 다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다.



이야기 줄거리는 이러하다. 여성 인권 운동이 활발하고, 여성들도 모두 직장에서 일하며 자기가 필요한 돈은 스스로 벌고, 가정생활에서도 아내와 남편이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느 날 사건이 일어나고, 나라에 계엄령이 선포된다. 국가 비상사태. 언론이 통제되고, 거주 이전의 자유가 제한된다. 하지만 대의를 위한 자유의 제한이므로 모두들 받아들인다. 그러나 자유의 폭은 점점 줄어들었고, 상점은 더 이상 여자가 운영할 수 없고, 직장에서의 여성들도 모두가 쫓겨난다. 여성 이름으로 된 계좌는 지불 불능 상태가 되어 무조건 남편, 혹은 가까운 남자로부터 돈을 타 써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자유의 제약은 점점 더 좁혀진다. 그래서 주인공은 남편과 딸아이와 국경을 넘으려 하면 곧 붙잡히고 남편은 생사를 알 수 없고, 딸아이는 어느 기관에 보내죠 엄마와 아빠를 잊고 오로지 여자가 해야 할 일만 세뇌 당하며 투미한 사람이 되고 만다.


주인공은 어느 체육관 곳에 수많은 여성들과 감금당한 채 교육을 받고, 어떻게 하면 임신이 잘 되고, 아기를 잘 낳을 수 있는지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한 '사령관'의 집에 배당이 된다. 그녀는 사령관의 집에서 유령처럼 살며 아기 낳는 기계로 전락한다. 만약 아기를 낳지 못한다면, 두 개의 선택지를 선택할 수 있는데 뭐가 됐든 간에 끔찍한 건 매한가지다. 아니, 이곳에 있어도 마찬가지로 끔찍하다. 그래서 주인공이 오기 바로 직전에, 그녀의 방을 쓰던 시녀가 그 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정도로.


불빛이 반사되여 그림의 느낌이 반감됐다. ㅠㅠ 


주인공은 이전에 그녀의 방에 살던 사람의 운명과 같은 길을 갈까, 다른 길을 갈까...


결말은 열린 결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밝게 마무리되진 않는다. 그녀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국경을 넘었다 해도 결국 남자의 도움에 의해 이뤄진 일이며 그녀 스스로 선택해서 이뤄낸 건 없다. 철저하게 여성은 배제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이기 때문이다. 뭔가 암울한 결말이지만 그래도 열려 있는 설정이 참 탁월하다 생각하고, 작가의 혜안이 마음에 든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상상한 이 디스토피아는 완전히 허구의 디스토피아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불과 몇 백 년 전에는 이런 시대였고, 지금도 중동이나 이슬람 국가에서는 (양상은 조금 다르지만) 이 작품 속 여성들처럼 여성들의 지위가 이러하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진보와 개방이 당연하다고 느끼지만, 생각보다 보수와 억압으로의 역행은 쉽게 일어난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이런 변화를 목도했기 때문에 『시녀 이야기』를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시녀 이야기』는 지금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이번에 출간된 그래픽 노블 버전의 『시녀 이야기』는 원작은 잘 살리면서, 원작이 보여주지 못한 시각적 효과를 충분히 잘 그려내고 있다. (디스토피아의 세계는 여러 매체 중에서 그래픽 노블이 제일 잘 표현하는 것 같다. 소설이나 영화 보다 더)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으신 분이나, 혹은 『시녀 이야기』를 읽고는 싶은데 아직 소설이 엄두가 안 난다 하시는 분은 그래픽 노블로 표현한 『시녀 이야기』를 추천한다. 그림의 구성이나 표현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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