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의 심리학 - 비로소 알게 되는 인생의 기쁨
가야마 리카 지음, 조찬희 옮김 / 수카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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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없는 요직이 아니더라도, 현재의 IT 기술과 그 기술을 이용한 업무를 따라가지 못하더라도, 혹은 경제적 사정이 절박하지 않더라도 여성 또한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 정년까지 일할 수 있다. 


여성이 일을 하는 것, 일하고 싶어하는 것은 '미안해할 일'도 아니고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훌륭한 일도 아니다. 이는 그저 '당연한 일'이다. 


나 또한 대학과 병원에서 '이제 정년입니다'라는 말을 듣는 그날까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 자리에 꼭 붙어 있을 것이다. 


가야마 키라, 『나이 듦의 심리학』, 44



나이가 들어 제일 먼저 떠올리는 문제는 바로 생계가 아닐까 한다. 학교를 마치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우리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생계 문제는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혈기왕성하게 일하고 돈을 모아 생활의 기반을 마련하는 청년기를 지나, 어느덧 중년이 되고 정년을 생각해야 할 때가 되어도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문제는 먹고사는 문제인 생계 문제가 제일 중요하다. 여기에 나이의 문제와 남녀의 문제는 있을 수 없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먹고살아야 하니까. 그리고 더 나아가, 경제 활동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을 넘어서 정신적인 문제와도 이어져 있다.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한다지만, 자신의 일에 본인의 자존감, 삶의 의미, 정체성 등을 자신도 모르게 투사하는 것이다. 일이란 자신의 생계를 해결해 주는 것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무엇이다. 따라서,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과 정신을 위해서라도 꼭 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정신과 의사로서 현재 릿쿄대학 현대심리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현재 57세,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두근두근 걱정! 그나마 다행인 것이라면, 저자가 의사로서 교수를 그만둔 후에도 어디 한적한 시골로 내려가 개업의로 지내면 정년에 구애 없이 경제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랄까(저자의 친구들은 이걸 부러워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저자가 정년 후 어떤 선택을 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의사 직업을 가진 저자도 보통의 우리들과 같은 생계 걱정과 정년 이후의 삶을 고민하는 것이 친밀하게 느껴졌다. 또 저자는 57세 비혼으로서, 부모님과 동생 외에 스스로 꾸린 가정은 없는데 여기서 오는 여러 가지 고민을 하는데 아, 몇 십 년 후의 나의 고민이 될랑가 싶어 마음이 알딸딸했다(지금은 내가 젊으니까 그렇다 쳐도 늙어서 나 혼자 일 때 누가 나와 함께할 것인지. 눈물 ;ㅅ;).


보통 이런 유의 책은, 독자들에게 조언을 하거나 심리학 용어나 실험을 예로 들며 독자들을 가르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이 듦의 심리학』은 저자 스스로의 고민과 갈등하고, 방황하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때론 똑 부러지게 자신의 결단을 말하기도 하며, 때로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보통 사람들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유보하기도 한다. (선택에 정답이란 없으니 잘 모르겠는 건 모르겠다고 말하고 넘어가는 게 현명한 선택!)


이 책은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중년의 저자가, 본인 나이에 들어서서 맞게 된 변화나 생각,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나 자기 검열, 중년의 성과 연애, 노화에 대한 불안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문체는 고압적이거나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다. 이야기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전개된다. 지극히 저자 개인적인 생각이나 경험, 혹은 내원한 환자의 이야기 등이 곁들여져 있는데 크게 남일 같지 않아서 함께 고민하고, 생각하며 읽었다. (내 부모님이 떠올라서 그랬고, 몇 십 년 후 내 이야기일 거라 또 그랬음)


이 책을 읽으며 제일 현실적으로 와닿았던 건 위에 언급한 경제 활동 문제였다. 그다음으로 인상적이었던 건 중년의 성(性)이었다. 아직 한 번도 중년의 성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고(사실 생각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관심이 없었는데 이 책을 읽고 이 나이 대의 사람들은 이런 고민을 하는구나 싶었다.



정신과의사가 도덕가는 아니기 때문에, "선생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남편이 아닌 남자랑 섹스했어요"라고 털어놓는 여성에게 "그러면 안 돼요. 당장 그만두세요"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환자들은 그 사실을 털어놓으면서도 자신이 아직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기쁨 때문에 눈물을 글썽이고 볼이 빨개진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의 우울했던 기분까지 싹 사라졌어요"라고 말하는 여성에게 나는 의사로서 "건강해지셨으니 다행이네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가야마 리카, 『나이 듦의 심리학』, 126


이 부분을 읽으며 생각난 것은 미국드라마 <The good wife>였다. 이 드라마를 보고, 40~50대 부부나 연인에게도 성적 긴장감은 중요하구나 싶었다. 기본적인 욕구 충족을 넘어, 자기만족, 정체성, 자신감 등 성 문제는 다각도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정체성을 형성하는구나 싶어서였다. 벼랑 끝에 섰던 여자 주인공이, 어떤 일을 하나씩 해결해 나가자 주위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고 어떤 남성은 호감을 보인다. 여성은 바스러지고 사라질 뻔한 자존감과 자신감을 추스르고 점점 자신감이 넘치고, 일은 더 잘하고, 매력적인 여성으로 거듭난다. 여기서 '매력'은 여러 가지를 내포하는데 그중 성적 매력도 포함된다.


우리나라 드라마도 어려움에 처한 여주들이 꼭 등장하나, 이 여성에게 도와주는 남성은 여성에게 성적 매력보다는 연민이나 애틋함, 성격적 매력에 끌리는 모습을 연출하는데 미국드라마에서는 성적 매력도 빠트리지 않고 연출해 <The good wife>를 보며 꽤나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가임기가 끝나는 시기부터 여성은 곧장 할머니로 접어들어 손주들을 돌보며 죽음을 준비했다. 지금은 우리 모두 느리게 늙어가고 있다.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도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천천히 늙어간다. 그런 만큼 성에 대해서도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가치관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세상이 개인화되고, 파편화되어간다지만 이 책을 읽고 느낀 것은, 개인의 시간과 공간도 필요하되 타인과 함께하는 시간과 공간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년을 몇 년 앞두지 않은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 교수의 말랑말랑한 책이다. 뭔가 똑 부러지는 조언을 듣기보다는 스스로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은 분께 추천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다양한 생각이 나무가 줄기를 뻗듯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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