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슈필라움의 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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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심리학자이자 여러가지문제연구 소장인 김정운 박사의 본격 바닷가 작업실 마련 에세이. 이 외에도 여러가지문제연구 소장님답게, 여러 가지 문제를 다룬다. 이름만 들어서는 김정운이 누구지 했는데, 사진을 보니 알겠다. 티비에서 자주 본 분!! 티비에서 철학 이야기를 많이 하셨고, 또 내가 이 분이 쓰신 다른 철학 책을 읽었던 터라(아마도 청소년을 대상으로 쓴 철학 교양서적이었을 것이다) 철학을 전공하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 심리학 전공자! 그 전공이나 이 전공이나, 나에게는 어렵기는 매한가지. 퓨ㅅ퓨

어쨌든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라고 하여, 그 다른 시간의 흐름을 느끼고자 읽었다. 나 역시도 본가에서 독립한지 어언 1개월, 내 집에서는 다른 곳과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기에 어떤 동질감, 동감을 얻고자 읽은 것이다.

우선은 시의적절하게 이 책을 잘 읽은 것 같다. 독립한 지 얼마 안 돼 나는 공간에 새로운 눈을 떴다. 내가 어떤 공간에 있는지에 따라 나의 감정, 나의 생각 심지어 나의 기억조차도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마들렌을 맛보고 옛일을 회생하는 폴, 작가 이름을 따서 어떤 맛으로 기억이 떠오르는 효과를 '프루스트 효과'라고 한다. 그런데 '맛'이나 이와 비슷한 '향' 뿐만 아니라 '장소'라는 것도 우리의 뇌에 큰 자극을 준다. 어쨌거나 이런 사실도, 익숙한 집과 가족을 떠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 집이 참 좋은데 창문을 열면 차 소리로 좀 시끄럽고, 층간 방음이 잘 안된다는 단점만 빼면 다 좋다. 그런데 방음 문제는 별 신경 안 써진다. 이곳이 아파트이긴 해도, 전형적인 오피스텔 구조라 대부분 1~2인 가구가 입주해 있는데 그래서 거의 항상 24시간 조용하다. 다들 나 빼고 낮엔 일하러 가고, 밤에 늦게 일터에서 돌아와 쥐 죽은 듯이 잔다. 또 창문이 넓고, 북향이긴 해도 반사광이 새벽부터 잘 들어와 해가 떠있을 때는 언제나 밝다. 심지어 비가 오는 궂은 날씨 때에도 불을 켤 필요 없이 밝다. 왜냐면 하늘이 잘 보이기 때문이다.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어도 구름을 통과한 태양빛(산란광) 때문에 밝은 것이다. 왜 가게는 남향이 아니라 북향으로 구하라고 하는지 알겠다. 낮에 컴퓨터 하고 책을 주로 읽는 나에게는 직사광선이 들지 않고, 언제나 밝은 지금 집이 참 좋다. (직사광선은 책 상태와 독서에 쥐약. 참! 빨래 말리는 것이 걱정이긴 한데, 대신 선풍기를 건조기 삼아 옷을 말리고 있다)

아늑하고 조용하고(물론 문 닫으면), 문을 열면 곧 세상과 만날 수 있고... 너무 나 홀로 있지 않은 채, 나 혼자 있을 수 있는 이 공간이 나는 좋은 것이다. 밤이면, 저 건너편으로 보이는 아파트의 불빛도 예쁘다. 어쨌거나 지금의 나는 만족스럽다. 공간의 이동, 이것만으로도 사람은 달라질 수 있고, 느껴지는 감정이 다양하며, 어떤 새로운 가능성이 내 앞에 펼쳐지는 것 같다.




모든 동물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고 한다. 밀집된 공간에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면 이상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서로 잡아먹으려고 한다. 새끼도 구별 못한다. 심지어 자기 새끼를 잡아먹기까지 한다. 더 이상 교미도 하지 않는다. 동물행동학자 존 칼훈은 이 같은 행동을 '행동 싱크'라고 불렀다. '싱크'는 음식물 쓰레기를 받는 용기처럼 온갖 쓰레기 같은 행동들의 집합을 뜻한다. (- 7쪽)

'심리적 공간'은 '물리적 공간'이 확보되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서구의 근대 부르주아 출현 이후에 생긴 가장 큰 주거 상의 변화는 '남자의 방'의 출현이다. 취향과 관심이 공간으로 구체화되었기 때문이다. 내 실존은 '공간'으로 확인된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자에게도 남자들처럼 '자기만의 방'이 있다면 얼마든지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공간이 의식을 결정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슈필라움'의 가치를 너무나 무시하고 살아왔다. 공간이 있으면 '슈필라움'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도 나만의 '슈필라움'을 만들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아무리 보잘것없는 작은 공간이라도 내가 정말 즐겁고 행복한 공간, 하루 종일 혼자 있어도 전혀 지겹지 않은 공간, 온갖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그런 공간이야말로 진정한 내 '슈필라움'이다. (11-12쪽)

막연하고 추상적인 가치에 너무 휘둘려 살아왔음을 오십 후반의 나이가 되어서야 깨닫는다. 여수라는 낯선 공간에서 혼자 좌충우돌하면서 '삶이란 지극히 구체적인 공간 경험들의 앙상블'이라고 정의 내렸다. '공간이 문화'이고, '공간이 기억'이며 '공간이야말로 내 아이덴티티'라는 이야기다. (12-13쪽)

<'삶이란 지극히 구체적인 공간 경험들의 앙상블'이라고 정의 내렸다. '공간이 문화'이고, '공간이 기억'이며 '공간이야말로 내 아이덴티티'라는 이야기다.>라는 문구가 참 와닿는다. 새로운 공간에 와보니 와닿는 말. 아마 독립하기 전이나, 혹은 독립한 지 오랜 시간이 뒤에 이 문구를 읽었더라면 이렇게 와닿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쩄든 이 책은 서울에서 여수로, 다시 그 아래의 섬에 정착하게 된 김정운 박사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유학하던 독일과 일본의 이야기도 짧게 담겨 있고, 여수에서 서울로 이동하는 기차 안의 공간 이야기와 '배'라는 독특한 이동 수단의 공간 이야기도 있다. 그곳에서 보는 '해'는 다른 곳에서 보는 '해'와 참 다르다는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참, 끝에는 자주 아재식 농담이 곁들어져 있는데, 이런 농담은 내 취향 아니었음.. 으악, 아재요. 그런 농담은 그만-)

참, 이 책을 읽으며 꽤나 놀랐던 건 김정운 박사가 교수를 그만두고 일본에 가서 4년 동안 미술을 배웠다는 것, 그리고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이다. 유학파(??!)인 만큼 그림도 수준급이신데 그림 역시 2차원의 공간을 다룬다는 것에서 공간에 관한 예술이다.

공간에 관한 이야기, 흥미롭게 읽었다.(물론 아재식 개그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당황! 내 취향은 결단코 아니다!!). 어쨌든 결론은 뭐다?! 우리 모두에겐, '자기 자신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

(참, 미역창고는... 내가 봐도 배보다 배꼽이 너무나 크고, 그 부동산 중개인 말마따나 나도 그 말을 했을 것 같다.('옆 섬에 어떤 사람이 다 쓰러져가는 미역창고를 엄청 비싸게 샀다'며,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비웃었습니다. 차마 나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 260쪽) 에필로그에 잠깐 언급됐듯 수조 바닥에서 물이 올라오다니... 이 물이 그냥 물도 아니고 바닷물일 텐데 정성 들여 가꾼 미역창고가 언제 또 바스러질지 걱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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