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미숙 창비만화도서관 2
정원 지음 / 창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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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나서 가슴이 먹먹하고 왠지 알싸한 느낌이 드는 만화책을 읽었습니다. 창비에서 나온 『올해의 미숙』입니다. 이 작품을 그린이는 '정원'이라는 분으로 단편 「노르웨이 고등어」, 「삼점몇키로」를 그렸고, 웹툰 플랫폼에도 몇 편의 작품을 연재했습니다. 『올해의 미숙』은 정원 님의 첫 장편 만화입니다.



이 작품을 읽은 계기는 표지 때문입니다. 주인공으로 보이는 여성이 숲속 오솔길에서 홀로 선 채 뒤돌아선 모습이 어딘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도 같고, 나와 이어져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요. 당장에 달려가 저 옆에 서서 같이 걸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아마도 어린 시절, 몇 발 앞서가는 엄마가 저렇게 뒤돌아서서 내가 오는지 안 오는지 확인하고 빨리 오라고 부르는 것 같은, 기분 좋은 아련함 같은 게 느껴져요.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나를 부르고, 나를 필요로 한다는 느낌. 알싸하게 슬픈 듯 설레는.


이 만화의 주인공은 '장미숙'이라는 여성입니다. 만화의 시작은 미숙의 언니, '정숙'이가 다발성 골수종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는 데서 출발합니다. 다발성 골수종은 혈액에 종양이 생겨 뼈를 녹이고, 뼈를 부러지게 합니다. 정숙은 처음엔 희망을 갖지만, 병세는 점점 악화되었고 결국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깁니다. 이때 정숙은 동생 미숙이에게 '아기가 낳고 싶어'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미숙은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합니다.


어린 시절, 정숙이와 미숙이는 사이좋은 자매였습니다. 하지만 자매의 부모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대학 동기로 함께 문학을 꿈꿨지만, 남편만 시인이 되었고 아내는 생활 전선에서 남편과 딸 뒷바라지를 하며 하루하루 고단하게 살아갑니다. 그런 아내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습니다. 억울함, 야속함. 여러 마음이 들었겠죠. 아내는 남편에게 날 선 말들을 쏟아냅니다. 남편은 화가 납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 책을 아내에게 던집니다. 하지만 책은, 아내에게가 아닌 막내딸 미숙이의 얼굴로 날아갔고 미숙의 얼굴엔 큰 흉터가 남았습니다. 엄마는 흉터 치료를 잘 하는 병원을 알아두지만, 딸을 데리고 병원에 가지 않습니다. 돈이 드니까요.


첫째인 정숙은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했고, 잘 따랐지만 아빠에게 딸은 안중에 없습니다. 아들이 아니란 이유로 사랑과 관심을 주지 않았던 거죠. 정숙은 시를 써 아빠에게 보여주지만 비웃음만 돌아옵니다. 반면에 둘째 미숙은 문학 재능을 타고났습니다. 큰 노력을 안 했음에도 상을 탑니다. 그래서 언니, 정숙이는 삐뚤어지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는 날이 점점 줄었지만 술을 마시고 집에 온 날이면 꼭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했습니다. 정숙이도 그 아버지를 따라 동생인 미숙이를 심하게 학대합니다. 폭력을 사실 이 책에 단 한 장면도 안 나옵니다. 하지만 여백의 느낌, 캐릭터들의 사소한 행동과 표정에서 잘 느껴집니다.


이런 가정 환경에서 사는 미숙은 학교에서도 잘 적응하지 못합니다. 친구가 없고, 반 아이들에게 '미숙아'라는 놀림만 당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김재이'라는 친구가 전학을 옵니다. 어딘가 날카롭고 카리스마 있는 아이입니다. 재이는 미숙이와 친구가 됩니다. 언니의 빈자리를 재이가 대신 채워주게 된 것이죠.


하지만 사정이 있어 재이와 헤어지게 되었고,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로 진학했을 때 둘은 다시 만납니다. 예전처럼 단짝 친구가 됩니다. 함께 못해 본 것도 하고, 1박 2일로 여행도 갔다 옵니다.


문제는 여행을 다녀온 다음에 터졌어요. 재이가 미숙이의 집안 이야기를 그대로 소설로 써서 상을 받게 된 것이죠. 미숙이는 화가 나서 재이에게 따집니다. 하지만 재이의 말, "뭐래. 쪼다년이."


...... 미숙은 충격을 받고 학교를 그만둡니다. 도서관을 다니며 검정고시를 통과합니다. 미숙은 예전과 달리, 도서관에서 만난 남자에게 먼저 다가가고 둘은 사귀기 시작합니다. 미숙은 직장을 구해 일하고, 집에서 나와 독립합니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병에 걸려 3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의 피를 이어 받은 언니도 다발성 골수종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다 죽게 됩니다. 생활력이 없어 열등감에 시달린 아버지는 살아생전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했고, 아버지를 갈망했던 정숙은 아버지의 재능을 받은 동생에게 열등감을 느껴 미숙에게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폭력을 행사하던 아버지와 첫째 딸 정숙은 벌을 받은 건지, 그렇게 병에 걸려 죽게 된 것이죠.


가족이 죽자 어머니는 미숙의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마침 예전에 살던 집은 허물어졌습니다. 옛 기억, 끔찍했던 일이 벌어졌던 그 집은 아버지, 언니와 함께 없어지게 된 것이죠.


학대를 한 사람이 모두 죽고 긍정적인 요소만 남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해피엔딩보다 깊은 여운을 남기고 끝납니다. 바로 마지막 컷 때문이 아닐까 해요.





그동안의 일들이 먼 미래처럼 느껴진다.


왜 '먼 미래처럼' 느껴질까요. 왠지 씁쓸하고 슬픈 느낌이 들어요. 리뷰를 찾아보니 대부분 긍정적인 결말이라고 하던데, 저는 새드엔딩처럼 느껴져요.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다시 되풀이할 것 같은 느낌. 왜 미숙이는 도서관에서 남자를 만났을까, 공부하는 남자가 아니라 일을 하는 생활력 강한 사람을 만났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들이 들었거든요. 사실 남자가 무슨 공부를 하고, 나중에 어디에 취직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만, 그래도 앉아서 공부하는 사람이나 어딘지 어리숙한 사람보다는, 일을 하는 사람이나 세상 물정을 잘 알고 '생활과 직접 맞부딪혀 철이 든' 남자를 만났으면 했거든요.


그리고 학교를 그만두며 헤어졌던 '재이'가 작품의 끝부분에 다른 친구를 통해 다시 등장합니다. 만화엔 더 이상 실제로 등장하지 않지만, 재이가 쓴 소설책과 함께 나타나죠. 여전히 친구를 등쳐먹(?)으며 사는 것 같으나, 어쨌거나 재이는 미숙을 잊지 않고 그 주변에 있음을 드러냅니다.


재이는 조금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미숙이의 아픈 사정을 소설로 쓰고 상을 받을 만큼 나쁜 친구이긴 한데, 그럼에도 여행 갔을 때 재이가 한 행동을 보면 재이는 미숙이를 상당히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냥 친구를 뛰어넘어서요. 이때 미숙은 당황을 합니다. 어쩌면 이때 미숙이의 행동에 재이가 상처를 받아 그 앙갚음으로 소설을 쓴 것인지, 아니면 그냥 심심풀이, 혹은 떠보려고 툭 건드려 본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 작품은 대사가 많이 없습니다. 설명도 많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림의 사소한 변화나 작은 장치들을 보고 추측해야 합니다. 해석의 여지가 크고, 읽는 사람마다 다른 느낌, 다른 생각을 할 가능성이 높은 작품입니다. 그런 만큼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게 느껴져요.


사실 이런 소재, 이런 줄거리의 책은 이미 많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원의 『올해의 미숙』은 가슴에 여운을 깊게 남깁니다. 그뿐만 아니라 마지막 컷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어 이 작품의 완성도를 한 단계 높입니다.


먹먹하고, 아련하고, 알싸합니다.


어쨌거나 부디, 저 오솔길을 따라 긍정의 미래로, 밝음의 미래로 미숙이가 한 발 한 발 내디뎌갔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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