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죽재전보 클래식그림씨리즈 4
호정언 지음, 김상환 옮김, 윤철규 해설 / 그림씨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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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인지 모르겠지만 판화가 좋다. 왜 좋은지 그 이유는 나도 몰라. 그냥 좋아. 아마 십 년도 더 된 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판화 전시를 한다고 해서 당일로 부산에서 서울로 전시 관람을 하고 온 적이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그때 봤던 판화 작품들은 씻은 듯 깨끗이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지만 당시 전시 내용이 무척 좋았고 만족스러웠던 기억은 생생히 난다. 기차 삯 10만 원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뭘 봤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아도)


나랑은 정말 안 맞다 싶은 일본 문화도, 그들의 전통 판화인 우키요에만은 정말 좋다. 그림이 단순하지만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매력이 뿜뿜. 톤 다운된 따뜻하고 부드러운 색감도 내 마음을 끄는 요소 중 하나. 현대 판화 작품도 마냥 좋다. 현대 작품은 판화라는 티가 별로 안 나서 회화인지 판화인지 나로서는 구분을 잘 못하겠지만, 그냥 좋구나 싶어서 찾아보면 판화다.


판화가 좋은 이유는 판화 특유의 기법 때문에 자연스레 선이 간결하고 가볍다는 것, 그래서 깔끔하게 보이는 것이 매력인 것 같다. 뭐, 판화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대체로 판화의 깔끔함에 매료된다. 활자도 마찬가지다. 요즘 인쇄된 글자는 대체로 작아서 느낌이 별로 안 나지면, 조선시대 이전의 책만 봐도 정성스레 디자인하고 주조한 활자 인쇄본은 어딘지 사람을 홀리는 매력이 있다. 


이번에 호정언의 『십죽재전보』를 봤는데 좋았다. 처음 우키요에를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을 느꼈다.



물론 우키요에와 느낌이 다르고, 공법도 다르고, 시대도 다르지만 색감에서 우선 우키요에를 떠올리게 했다. 중국 그림에서 이런 색감을 볼 줄이야. 그동안 중국 그림이라 하면 선으로 빈틈없이 꽉 차고, 빨갛고 강렬한 코발트 색감에 참으로 질린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 동양미술사 책에 나오는 중국 그림은 남과 북의 그림 화풍은 완전히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이질적이고, 질리는 느낌이 강했다. 그랬는데 『십죽재전보』를 보고 지금까지의 내 편견이 깨졌다.



그림보다도 여백이 더 많은 책이지만, 호정언이 『십죽재전보』를 완성하는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 게 이해가 된다.



그림의 소재는 주로 중국의 역사적 사실이나 사건, 유명 인물의 일화나 상징적 사물, 혹은 집에 수집해 놓은 골동품이나 꽃나무, 돌, 술병 등이다. 편지나 시를 적은 종이에 들어가야 하므로 그림의 크기도 대체로 작은데, 그럼에도 그림의 선이나 색면을 보면, 제작에 보통 노력이 들어간 게 아님이 느껴진다.



호정언은 중국 명나라 말기, 문인이자 문인화가였다. 관직에 있다가 내려와서 서재 딸린 집 주위에 십여 그루의 대나무를 심고 그 집의 이름을 '십죽재(十竹齋)'라고 지었다. 


'전(箋)'은 편지나 시를 적는데 쓰인 종이를 뜻한다. 아주 옛날 중국은, 종이가 귀해 꼭 써야 할 말만 간략하고 짧게 적어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러다 종이 생산량이 늘어나고, 시를 즐기는 사람이 많아지자 전(箋)에 시도 쓰기 시작한다. 또 제지 기술이 향상되어 종이를 물들이거나 문양을 찍는 기술도 보다 정교해졌고, 종이를 물 들이거나 문양을 찍어 편지나 시를 쓴 종이를 시전지(詩箋紙)라고 부르게 됐다.


시전지의 역사는, 9세기 전반에 시작해 유서가 깊은데 그 정점을 찍은 것이 바로 호정언의 『십죽재전보』라고 한다. 여기서 마지막 글자, 보(譜)는 여러 시전지를 묶었단 의미다. 


출판업을 하게 된 호정언은, 직접 그림도 그리고 교우하던 문인이나 화가의 글과 그림을 받아 본떠가며 화집이나 시전보를 간행했다. 그의 집에는 당시 각공이 십여 명이 고용돼 있었다는데 호정언과 사이가 좋았고,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받고 성장하며 제작했다고 한다. 


나는 그림이나 판화에 문외한이지만, 정성 들여서 만든 것이 느껴진다.






   두판에는 세 가지 어려움이 있으니, 그림은 모름지기 우아해야 하고 대로는 눈동자를 빠져들게 하는 것, 이것이 제일의가 된다. 그 다음은 새길 때에 거칠고 경박함을 꺼리고 미련하고 노둔하여 본래 원고의 신채를 쉬이 잃는 것을 더욱 싫어한다. 그 다음은 인쇄할 때에 이전에 완성된 방법에 구애되어 자신이 깨우쳐 마음으로 판단하지 못하거 천연의 운치를 손상시킬까 두려운 것이다. 


   그 세 가지 하자를 제거하고 여러 아름다움을 갖춘 뒤에야 크게 공교로운 것이 나올 수 있다. 이에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고요히 하며 재물을 가벼이 하고 능력에 맡겨야 한다. 주인의 정신이 홀로 이 세 가지 위에서 터득하여 그 사이에서 힘차고 넓게 흘러간 것이 바로 이 전보이다.


- 56쪽,  이극공이 쓴 「십죽재전보서」 中


실제 호정언이 어떤 사람이 알 수는 없으나, 이 구절만 읽어 보면 호정언은 출판을 하면서 몸과 마음을 닦고 자신과 인쇄 기술의 한계를 보다 확장시킨 것 같다. 유교 문화권이라 출판과 인쇄 일에서도 자기수양의 의미가 깃들어 있고, 그래서 중국 시전지 역사상 가장 정교하고 훌륭한 인쇄 기법이 적용된 책으로 인정받는가 보다.



책은 시전지 역사와 명나라 말기 때 활동한 출판업자 호정언, 그리고 『십죽재전보』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과 전보 머리말, 십죽재전보서가 실려있고 그 뒤로 『십죽재전보』에 실린 그림과 그 그림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다. 동양의 여백의 미를 잘 살려서 만든 책(그림책)으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엇보다 그림 소재와 색감이 마음에 들었다. 그림 그릴 때 따라서 그려도 좋고, 색감 공부나 여백 배치 공부에도 좋을 것 같다. 무엇보다 그림 보는 안목과 감각이 늘 것 같다. 


동양화나 중국 미술사, 편지 문화에 관심 있는 사람이 봐도 좋고, 그림 그리는 사람 특히 디자인하는 사람들에게도 좋을 것 같다. 종종 그림책을 보는데, 이런 그림책은 처음이라 색다르고 좋았숑.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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