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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이 이야기 ㅣ 암실문고
김안나 지음, 최윤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의 골자는 언뜻보면 단순하다. 오스트리아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에 사이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카. 위스콘신 그린베이의 한 대학에 체류 작가로 초대받아 열악한 기숙사를 피해 방을 구하는 과정에서 조앤 트루트마를 만나고 우연히 흑인 혼혈인 한 남자 대니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다. 그러면서 그 속에 감춰진 1950년대 미국의 뿌리 깊은 인종 차별을 목격하게 되고 백인과 흑인 사이 그 어느 곳에도 끝내 본인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며 방황했던 대니의 얘기 속에 본인의 얘기를 대입한다. 여기까지는 흔히 경험하게 되는 인종 차별과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라 사실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 이 책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면서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 번째는 선의라는 말은 어디까지 이해받을 수 있나?
이 질문은 매를레네 빙클러에서 시작한다. 매를레네 빙클러는 사회복지사로서 대니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다만 그 기저에는 당시의 인종차별적인 이해가 녹아 있다. 매를레네 빙클러는 대니가 행복했으면 하지만 그렇기에 백인 가족으로의 입양은 반대다. 서로의 문화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적응하기란 쉽지 않기에 흑인은 흑인 가정에서 자라야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녀는 또한 대니에게 더 많은 가능성이 주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대니는 사생아로 남아서는 안 된다. 대니의 생부를 찾고자 했던 그녀의 적극적인 노력은 생모인 캐럴에게 부담으로 다가오고 캐럴은 끝내 자살을 시도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우리는 매를레네를 비난할 수 있는가? 그녀가 흑인을 열등하다고 믿고 '검둥이'와 교제했다고 믿으며 캐럴을 비난하는 것을 비판할 수는 있어도 그녀가 대니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선의가 항상 최선을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은 삶의 아이러니일 뿐이지 않은가? 우리의 선의가 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두려워 행동하지 말아야 하는가? 우리가 선의로 개입해 가져오는 결과와 행동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가 같다고 하면 그 경중은 어떻게 따져야 하는가?
마지막 장을 덮고서도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다. 결론은 오직 대니만이 내릴 수 있다. '흑인 가정에 입양 됐다면 지금보다 행복했을까' 하는 질문에 그냥 지금의 나로 받아들일 수 없느냐 반문한 대니의 말은 결론이라기보다는 유예다. 가정법이란 무의미하고 본인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두 번째는 '믿음'에 관한 질문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은 무엇에 기초하는가? 내 앞에 보여지는 것들에 기반한 나의 믿음에 오류가 있다면 그렇게 믿어온 나의 잘못인가 아니면 그렇게 밖에 볼 수 없었던 환경의 문제인가? 그리고 그 믿음은 수정이 가능한가?
"가시성은 하나의 멍에"라고 말과 함께 "시각은 거리를 필요로 하는 감각"이기에 "당신을 그리려면 당신을 만져봐야" 할 수 밖에 없다는 말에서 보여지는 것에 우리는 필요이상의 의미부여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보이는 것에 필요 이상의 정보값을 주고 의미부여를 하다보니 백인이 주류인 그린베이에서 흑인 혼혈인 대니의 삶은 불행했을 것이라고 짐짓 넘겨 짚게 되는 것일 테고 마찬가지로 아시아 사람이 드문 오스트리아에서 혼혈로 살아온 프란체스카의 삶을 동정하게 되는 것 아닐까? 실제로 대니는 명예 백인이라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로 백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살았고 프란체스카 역시 독일어를 하지 못하는 친모를 무시하며 끝내 고향으로 쫓아내는 역할을 했음에도 말이다. 그러니 "보인다는 것"은 단순히 시각적인 정보 이상의 어떤 정보값도 갖고 있지 못하며 보이는 것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했을 때 놓치게 되는 것들이 더 많다는 것을 이제는 깨달아야 할 때가 아닌가 말이다.
이제껏 경험한 소설들의 대부분이 미국 작가들의 것이다 보니 사실 문체서부터 좀 낯설었다. 거기에 더해 작품에 녹아든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의식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히는 것에 반해 여운은 좀 길다. 이제까지 고민하지 않았던 부분들을 건드린다는 점에서는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이 마냥 싫지는 않았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