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스미는 - 영미 작가들이 펼치는 산문의 향연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외 지음, 강경이.박지홍 엮음, 강경이 옮김 / 봄날의책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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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이 부족해. 어느 날 눈을 뜨고 생각했더랬다. 어떻게 해야 교양 있는 사람―교양 넘치는 사람이 아니다. 교양이 '있는' 사람이다―이 될까 고민이 됐다. 무턱대고 덤비기로 했다. 그러나 교양이라는 거대한 산은 길이 너무 많고, 정상은 구름에 가려져 있어서 내가 든 길이 제대로 든 길이 맞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정상을 보며 오르려고 해도 구름에 가려진 탓에 정상을 보지 못하니 가고 있는 길이 오르는 길인 건지 샛길로 빠진 건지 그마저도 아니면 하강하고 있는 건지조차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어쨌든 뭐든 봐야 했다. 교양을 위해서? 솔직히 말하자면 아니다.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다. 나는 부끄러움을 아는 부끄럼 많은 사람이므로 도서관에 갔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강원택著 「정당은 어떻게 몰락하나?」 집어들었다.

 

처음에는 재미있었다. 정말이다. 재미있어서 멈출 수 없었다. 휘그파와 토리파에 이어서 보수당 자유당이 등장하고, 계속 이어지는 정당정치 내용을 따라가는 건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영국의 조지와 윌리엄에 대한 사랑(그러니까 조지와 윌리엄이 너무 많아!) 때문에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윌리엄은 아까 그 윌리엄이 아닌 거지? 아니야, 아까 그 윌리엄이야.

 

처음에는 재미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졸음이 쏠렸고, 졸음을 이겨내자 눈이 퀭해졌다. 이제는 의식 없는 의식만이 남아 책을 읽어갔다. 이 기분에 대해서 많은 이들은 알 것이다. 또렷한데 뚜렷해지지 않는 기분. 그 때문에 나는 페이지를 다시 돌아가야 했고, 또 다시 돌아가야 했고, 그렇게 반복하며 더듬더듬 책을 읽어갔다.

 

눈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등도 아프고, 그냥 온몸이 아픔을 호소할 때에 이르러 신착도서란에 이 책을 보았다. 주인공의 등장이 너무 늦었을까? 바로 「천천히, 스미는」이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나는 손을 저었다. 이 역시도 정말이다. 대신 휴대전화 메모장에 얼른 제목을 썼다. 잊지 말고 나중에 읽을 요량이었다. 당장은 짧은 책 한 권이 절실했다. 그렇게 돌아섰는데 자꾸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아아, 그때부터였나보다. 나는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결국 등을 돌려 책을 꺼냈다. 읽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그냥 훑어만 보려고 했다. 산문이라고? 에세이는 취향이 아닌 걸. 그렇게 생각하며 페이지를 펼쳤다. 그리고 외쳤다(속으로!). 이건 반칙이야.

 

맨 첫장이 버지니아 울프라니! 제목도 '나방의 죽음'이 아닌가. 첫문장은 허를 찌른다. '낮에 나는 나방은 나방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외쳐야겠다. 이건 반칙이야! 어떻게 이 문장을 읽었는데 다음 문장을 읽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결국 굴하고 말았다. 그리고 늦은 밤까지 건조해진 눈동자를 굴려가며 읽어야만 했다.

 

여기서도 윌리엄이 때때로 등장해 나를 긴장하게 했지만, 여기의 윌리엄들은 생생한 나머지 그들의 내면을 훑어보는 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이 책을 읽는데 왜 허기가 가실까. 나는 100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그 시대의 풍경을 생생하게 보았고, 그 시대의 사회를 보았다. 그 시절의 문화를 보았고, 그 시절의 생각을 보았다. 나는 작가들의 사유를 너무나도 온전히 주워먹고 있었다. 심연의 깊이를 담담하고 솔직하게 풀어낸 에세이를 통해 넙죽넙죽 편하게도 받아먹었다. 한 번쯤은 해보았을 법한 고민들이었다. 그 고민들을 저자들도 하고 있었다. 내 고민을 저자들이 대신해 주었고, 내 고민의 해법을 그들이 대신해 찾아보았고, 사유의 헤맴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좌절과 고통, 쾌감을 이미 100년 전에 하고 있었다. 이건 꽤나 분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 안도감이 들었다. 이 고리가 저자들과 나라는 사람을 잇는 굵은 대칭점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버지니아 울프의 글에서 많은 고민을 했고, 맥스 비어봄의 글에서 외로워졌고, 도로시 세이어즈 글에서 반성했고, 제임스 서버와 마크 트레인에서 웃었다. 군데군데 보이는 불명확한 번역에 당혹감도 느꼈으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따라서 인간미 없는 차갑고 고립된 활자로 이런 흥분을 싹 틔울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싹 틔운 불멸을 함께 누린다. 언젠가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때가 되면 그건 중요하지 않다. 차가운 활자로 고립되어 안전하게 남은 그것은 그가 숨 쉬고 고뇌하던 공기로부터 여러 세대 떨어진 사람들의 심장과 샘에 여전히 오랜 불멸의 흥분을 싹 틔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한 번 가능했다면 자신이 죽어 희미해진 이름으로만 남은 지 오랜 뒤에도 여전히 가능하고 효력이 있으리라는 걸 그는 안다. ―윌리엄 포크너

우리는 너무 많이 읽다보니 감탄할 시간이 없고
너무 많이 쓰다보니 생각할 시간이 없다. ―오스카 와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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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내일을 위한 시간 : 한정판 A타입
장 피에르 다르덴 외 감독, 마리옹 꼬띠아르 외 출연 / 플레인아카이브(Plain Archive)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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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라(마리아 꼬띠아르)는 우울증 때문에 병가를 지내다 복직을 코앞에 두고 해고당한다. 회사 동료들이 그녀의 복직 대신 보너스 천 유로를 선택한 것. 하지만 반장이 동료들을 협박하고 다닌 탓에 공정한 투표가 치러지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지고, 곧 재투표 일정이 잡힌다. 그렇다고 해서 산드라의 복직이 쉬운 것은 아니다. 산드라의 복직이 결정날 경우 동료들이 받기로 한 천 유로의 보너스가 무산되기 때문이다. 산드라는 복직이 걸려 있는 월요일 재투표를 앞두고 직장 동료들을 하나씩 찾아가서 보너스 대신 자신을 선택해주기를 바란다.

 

우울증을 겪고 난 후 퇴직까지 당한 산드라는 인생이 망가져버렸다. 쉽게 눈물이 나고, 숨이 막혀 말을 못한다. 감정이 제멋대로 널뛰는 바람에 산드라는 감정에 끌려다닌다. 여기서 영화의 키포인트 하나가 나온다. 우울증이다. 산드라의 우울증 때문에 영화의 고저가 생긴다. 직장 동료를 만나서 긍정적인 답을 들으면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기뻐하지만, 부정적인 말을 들으면 밑도 끝도 없이 우울함에 빠져 약에 의존해야 한다. 이 감정의 줄타기는 영화 내내 갈등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다. 잔잔하고 극적인 사건은 없다. 그러나 감정의 미묘한 줄타기로 인해 보는 사람을 쉽게 물러나지 못하게 만든다. 이 영화가 결코 지루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 영화의 뚜렷한 서사라고는 산드라가 주말 동안 직장 동료들을 찾아가서 투표에 참여할 것인지 묻고, 그들에게 복직을 선택해주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열 여섯 명의 동료를 만나서 복직과 보너스 문제를 얘기하는 것은 굉장히 단순하고 반복되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반복성이 운동성을 지니게 되는 것은 이 대화 안에 서브 텍스트들이 등장해서다. 산드라의 동료 개개인마다의 사정이 불쑥 튀어나오면서 영화의 내용이 풍부해진다. 직장 동료의 입으로 듣는 변명 같은 사정과 때로는 산드라를 향한 동정과 연민으로 캐릭터마다 특색을 부여하고 입체화한다. 나아가 이 에너지가 산드라에게 전해지면서 산드라의 캐릭터를 보다 구체적으로 만든다. 동료와 산드라는 떼어낼 수 없는 호흡을 가지게 되는데, 동료들의 반응에 따라 산드라의 감정에 변화가 생기면서 보다 현실적인 캐릭터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이 현실에서 산드라는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 걸까.

 

산드라는 거대한 사회와 싸우고 있는 게 아니다. 우울증이라는 보이지 않는 병과 싸우려는 것도 아니다. 직장 동료와 싸우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사회의 부조리와 싸우고 있는 것도 아니다. 개인의 내면에 있는 불온한 감정과 싸우는 것도 아니다. 그럼 산드라는 무엇과 싸우고 있는 걸까. 산드라는 싸우고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살고 싶어 발버둥치는 것뿐이다. 사람답게, 사람처럼, 사람 같이, 사람의 방식으로 말이다. 동료들을 만나면서 절박하게 사정하고, 때로는 겁 먹은 패전병처럼 도망치고야 마는 모습은 이 사회 곳곳에서 눈에 띄는 누구와도 닮아 있다. 영화는 산드라라는 개인을 다룬 이야기일 뿐이지만,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든 개인의 사정을 다룬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비난 할 수 없다. 산드라를, 동료들을. 사정을 변명처럼 둘러댄다고 해서 비겁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사정에 따라 절박하고, 사정에 따라 비굴해지며, 연민에 따라 영웅이 되고, 변명에 따라 악인이 되기도 한다. 어쩌겠는가. 사람이란 무릇 그런 것을.

 

산드라가 동료들을 만나서 끊임없이 묻는 과정은 스토리를 끌고 나가는 단순한 방법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내일을 위한 시간이다. 내일은 단순히 투표날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내일은 투표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산드라는 내일의 두려움을 안다. 복직 찬성에 투표하는 동료들의 연민을 알고, 앞으로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볼 동료들의 마음을 안다. 동료들의 연민에서 불안과 감사와 비참함을 안다. 내일 이후에는 또 다른 내일이 존재함을 안다. 보너스를 놓친 동료들의 불만도 안다. 그들에게 인정 받고 때론 그들과 싸워야 하고 어쩔 땐 그들과 어울리며 견뎌야 할 시간의 공포 또한 안다. 그 모든 게 내일이다. 내일에는 또 다른 내일이 생기고, 내일은 또 다른 내일을 만든다. 내일은 결코 오지 않지만 결국 오고야 만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가깝고도 먼 미래다. 산드라는 미래로 가야 한다. 언제나 내일로 발 디뎌야 한다. 내일의 두려움 속에서 품고 있는 희망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다. 

 

마침내 투표날이 찾아온다. 이 영화의 결말은 쓰지 않겠다. 이 영화는 영화 같은 영화가 아니라 현실 같은 영화이므로. 단지 산드라의 입을 빌릴 뿐이다. "우리 잘 싸웠지? 나 행복해."
 

 

"나를 위해 뭔가 결심한 건 처음이야."

"절반이 네게 지지하면 내겐 재앙이겠지만, 나도 그러길 바랄게."

"너한테 투표할게. 이웃을 돕는 게 신의 뜻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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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괴롭힘, 사냥감이 된 사람들 - 괴롭힘은 어떻게 일터를 지배하는가
류은숙.서선영.이종희 지음 / 코난북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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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Loser, 외톨이, 센 척하는 겁쟁이

못된 양아치, 거울 속엔 넌

Just a loser, 외톨이, 상처뿐인 머저리
더러운 쓰레기, 거울 속엔 넌 I`m a

 -빅뱅, LOSER

 

과학시간이었다. 조별마다 과학 실험 중이었다. 여섯 명씩 짝 지어 앉은 테이블 위에는 긴 원통형 플라스크가 있었다. 과학 선생님은 실험 결과가 과학적 이론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한창 설명하고 있었다. 반쯤은 알아들었고, 반쯤은 흘려들었다. 칠판을 바라보느라 줄곧 고개를 돌린 터라 목이 아팠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가 책상 위에 있던 플라스크가 쓰러지는 걸 보았다. 비디오테이프를 느리게 돌린 것처럼 천천히 넘어지고 있었다. 판단할 겨를도 본능적으로 손부터 나갔다. 플라스크를 안전하게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플라스크는 책상에 닿기 전에 내 손에 닿을 예정이었지만, 내 손에도 닿기 전에 깨져버렸다. 정말이었다. 느려서, 모든 게 너무나도 느려서 나는 다 지켜보았다. 손에 닿는 차가운 플라스크 감촉조차 깨진 후에 전달됐다. 손에 남은 거라곤 삼등분으로 나뉘어진 플라스크 조각 중 입구 부분이었다.

와장창 깨지는 소리에 과학실에 있던 모두가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서 고개를 돌렸다. 일제히 같은 반응으로 같은 장소를 훈련받은 듯 바라보았다. 사태는 벌어진 후였다. 깨진 플라스크와 플라스크 입구를 꽉 쥐고 있는 내가 시선을 받아야 했다. 누군가가 말했다. "쟤 또 저러네."

아이들의 눈에 믿음이 어렸다. 믿음이 무서운 건 신념이 생겨서다. 신념은 개인의 불가침 영역이다. 그 영역이 나를 침략했다. 나는 편견에 힘없이 함락당했다.

"쟤 또 저러네." 이 말을 시작으로 말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부정적인 말들이었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나를 휘감은 감정은 생각을 죽여버렸다. 왜 플라스크가 넘어졌는지, 다 넘어지기도 전에 깨졌는지 의심은커녕 변명할 틈도 주지 않았다. 게다가 '또'라고 했다. 그 순간이었다. 나는 문제를 지속적으로 벌이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모두의 신념 아래에서.

 

덴마크 출신 레이프는 노르웨이의 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 그는 기계수리 숙련공으로 높은 임금을 받고 일했다. 그런데 동료들은 레이프의 덴마크 식 억양을 갖고 놀려댔다. 너무 자주 그러니 레이프의 대인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레이프는 '미친 덴마크 놈'이란 평판을 얻게 됐다. 많은 노동자와 감독은 그의 달라진 모습이 놀림 탓인지 몰랐다. 레이프의 사회적 접촉망은 무너졌다. 점차 더 많은 노동자가 떼 지어 레이프를 괴롭히는 사냥에 가담했다.

관리자는 레이프가 뭔가 잘못했고 수행성이 아주 낮은 노동자(그는 점차 그렇게 변해갔다)란 인상을 받았다. 레이프는 경고를 받았다. 그의 분노는 커졌고 정신적 문제로 발전해서 결국 병가를 내야만 했다. -P.12

 

 

시끄러운 과학실을 정리한 건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를 혼냈다. 가장 권위 있는 자가 내게 죄가 있다고 판결한 셈이었다.

그 후 '또'라는 말이 내게 주홍글씨처럼 새겨졌다. 반에서 사소한 일이 발생하면 원인과 이유를 떠나 내가 함께 거론되는 경우가 가끔씩 발생했다. 나는 어렸고, 몸짓이 서툴렀기 때문에 실수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아직 제 몸을 완전히 컨트롤 하지 못하는 그 무렵의 아이들이 벌이는 실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게는 또래 아이들과 달리 엄격한 잣대가 주어졌다. 연필을 떨어뜨리는 것도, 어쩌다 실내화를 깜빡 잊고 온 것도, 비뚤비뚤 그어버린 트랙 라인에도 엿볼 수 있는 내 서툴음은 일부에게 '또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로 새겨졌다. 어느 때부터 나는 또, 다시, 반복해서 실수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다시, 반복해서 실수를 저질렀다. 집착하면 할수록 실수는 잦아졌다.

 

고용주는 레이프와 문제를 논의하고 해결하려고 하는 대신 레이프의 숙련도에 못 미치는공정으로 그를 배치했다. 레이프는 부당하다고 느꼈다. 비난받을 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상태는 심각한 정신칠환의 하나로 전개됐고 더 긴 병가를 내야했다.

레이프는 더 이상 일자리를 유지할 수 없었고 새 직장을 얻을 수도 없었다. 그가 도움을 구할 곳은 사회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완전히 취업이 불가능하게 됐고 버림받은 추방자가 되어버렸다.

이 사건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레이프가 이전까지 많은 회사에서 훌륭하게 일했고 훌륭한 동료였고 고용주에게서 좋은 추천서를 받았던 사람이란 사실이다. -P. 12

 

나는 저항하려고 애를 썼다. 부당하다고 생각해서였다. 내가 저지르지 않은 실수와 내가 저지른 실수보다 훨씬 큰 비난이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반항하면 할수록 분위기는 생각한 것과 다르게 흘렀다. 아이들은 점차 나를 멀리했다. 내가 또래 아이들과 달리 과격하고, 쉽게 흥분하며, 폭력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누가 봐도 피해야 할 대상이었고, 그럴 만한 사유가 분명한 아이였다. 그건 또 다른 신호였다. 나는 대항했으나 쉽게 백기를 들었고, 노력했으나 금세 무기력해졌다.

 

왜 부끄러운가. 자신을 방어하지 못했다는 자책 때문이고 분함 때문이다.

 

"왜 그때 그 자리에서 문제 삼지 않았어?"

 

피해자들이 흔히 당하는 모욕이다. 심리적·정신적 괴롭힘은 평소 '주눅 들기'를 강요함으로써 자기방어를 사전에 봉쇄할 뿐 아니라, 그 후로도 오랫동안 생채기를 남긴다. 무력한 자신을 자책하고 수치심을 되새김질해야 하기 때문이다. -P. 93

1. 공격적인 행위가 시작된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는 대개 간접적이고 은밀하게 진행되기에 표적이 된 사람은 긴가민가하며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한다.

 

2. 시간이 갈수록 노골적인 괴롭힘이 이어진다. 피해자는 모멸감을 느끼며 점차 고립되어 간다.

 

3. 그 결과 피해자는 낙인찍힌다. 상황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거나 뭘 해볼 엄두를 못 낸다. -P. 115

 

시간이 흐를수록 반에서 나 외의 '이탈자'들이 생겨났다. 이유도, 원인도, 각 사건이 불러들인 결과도 달랐지만 공통점은 있었다. 다수에 의해서 내몰린 소수자란 점이었다. 반에선 절대로 소수자로 몰리지 않을 절대 권력자가 생기고 있었다. 권력자에 의해서 피해자가 돌아가며 결정될 때, 다르게는 재기할 기회가 주어졌다.

어제까지 나를 모욕했던 아이는 표정을 숨기는 데 익숙치 않아서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궁금하지도 않은 것을 묻고 놀랍지도 않은 것에 과도하게 놀라워하며 '친구'가 되었다. 역할놀이는 오래 가지 않았다. 친구가 어떤 계기로 제자리로 돌아가면 이전까지 쌓은 우정은 한순간 허물어졌다.

이런 반복은 자연스럽게 학습되었다. 내게도 기회가 생겼다. 치졸해지는 건 쉬웠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았다. 두려움이 커졌다. 불안했다. 이 과정이 고통스러웠는데,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비참하다는 고급스러운 말로 나를 비극적 주인공으로 포장할 재간이 없는 나이였으므로 직관적인 말로 대신 해야겠다. 나는 내 자신이 비굴하게 느껴졌다. 자존심은 종이보다 쉽게 구겨져 형태를 잃었다. 그에 따라 자존감은 밑도 끝도 없이 떨어졌다. 자존심이 박살나니 비굴해지는 건 더 쉬워졌다. 굴욕감은 배가 되었다.

 

혐오는 자기 가치를 주장하려고 자기보다 약자인 누군가를 표적으로 삼아 그 존재에 대한 존중을 부정하는 것이다. 약자를 도구 삼아 자기를 회복하려 들기에 고약할 수밖에 없다. 나보다 싼 취급을 받는 사람, 나보다 한 단계 아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그건 곧 내가 한 단계 위에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위안은 불안하다. 내가 저 자리로 내려갈 수 있다는 불안, 내가 혐오하는 그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까지 위안하진 못한다. -P. 140

 

도움을 청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아이였다. 아이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보호막은 어른이었다.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이자 이상적인 해결책도 어른이었다. 일종의 판타지였다. 어른들의 개입은 정의로울 거라고 믿었다. 사사로운 감정이 배재되고 보다 이성적일 거라고 믿었다. 관계가 재정립될 거라고 믿었다. 평등하게, 아주 평등하게.

그러나 어른들의 반응은 감당하기 벅찼다. 네 탓이야, 네가 잘못했으니 그러겠지, 남을 먼저 이해하렴, 스스로 해결해라, 애처럼 굴지 마. 넌 더이상 아이가 아니야. 모든 걸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나이, 나의 고통, 나의 존재. 나는 줄을 놓친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잡은 줄이 처음부터 썩은 동아줄이었다거나.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권력자에 대항해 싸우기엔 약했고, 도움을 청하기엔 아군이 없었다. 전략을 짜기엔 지성적이지 못했고, 한발 물러나기엔 내일이 보이지 않았다. 날마다 반에는 두 부류가 불균등하게 있었다. 즐거운 애들과 괴로운 애들. 나는 누군가의 우위에 설 만큼 이기적이질 못했고 누군가를 비난하면서까지 내 안위를 챙길 만큼 모질지를 못했다. 그렇게 고립됐다. 내가 한 선택이자, 환경에서 도태된 자가 맞이한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공감은 평등의식에서 나오는 인간적인 표현이다. -P. 144

수치심과 마찬가지로 연민에도 도치가 자주 일어난다. 도리어 괴롭힘 피해자에게 강자를 연민하도록 설득할 때도 있다.

 

'그 사람도 오죽하면 그랬겠느냐.'

'그 사람도 살아야 하니 용서해라.'

'열패감에서 그랬을 테니 이해해라.'

 

이런 식으로 변주되는 연민은 피해자 옹호가 아니라 '가해자 신세 망친다 주의'로 빠진다. 피해자의 고통에 책임지는 행동이 있고서야 용서, 화해, 회복 같은 가해자의 희망사항이 가능하다. 피해자를 돌아보고 죄책감과 성찰적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야 말로 가해자에게 진짜 필요한 감정이 아닐까? -P. 146

 

내가 마침내 법적 성인이 되었을 때도 변한 것은 없었다.

급하게 자리가 났다고 했다. 운 좋게 된 취업이었다. 첫 출근한 날이었다. 내가 맡은 업무가 자꾸 밀렸다. 작업하는 족족 오류가 나서 말썽이었다. 점심 시간 이후에도 잘 돌아가던 것이 퇴근 시간을 두 시간 앞둔 때부터 엇박자 났다. 두 시간 넘게 남아 있던 터라 조바심 내지 않으려고 했다. 퇴근 시간이 삼십 분도 남지 않았을 무렵에도 해결되지 않았다. 기어이 퇴근 시간을 넘겼다. 여기저기서 짜증내는 소리가 들렸다. 슬슬 엉덩이가 따갑고 식은 땀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자진해서 혼자 남아서 업무량을 맞추고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모든 직원이 제자리에 남아 있었다. '아', '씨-', '(전화통화) 늦을 거 같아' 등등 들려왔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옛날 어떤 도시가 뒤숭숭한 소문과 분열로 위협받았다. 시민들은 그리스의 저명한 철학자에게 전문가적 조언을 요청했다. 도시에 들어선 철학자는 거리의 거지 한 명을 지목했다. 저 거지가 문제의 원인이니 제거하라면서 시민들에게 그를 돌로 치라고 촉구했다. 사람들은 처음엔 머뭇거렸다. 아무리 봐도 거지는 도시에 해를 끼칠 만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철학자는 계속 시민들을 꼬드기고 부추겼다. 드디어 돌팔매질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도시는 걱정에서 해방되었다. 불운한 거지를 제거하고 기적이라도 일어난 양 모두 기뻐했다. -P. 113

'저 사람 때문에 우리 팀이 고생을 한다.'

'저 사람만 없어지면 우리 조직은 괜찮다.'

 

이런 식으로 문제의 원인도 해결도 피해자에게 떠넘긴다. 해결책은 자연스레 피해자를 치워버리는 일이 된다. '청소'가 끝나면 또 다른 피해자를 물색한다. 이런 식으로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면 무대는 그대로 두고 배역만 교체되는 일이 반복된다. -P. 171

 

퇴근 시간에서 삼십여 분 지났을 무렵에야 회사 시스템의 오류라는 게 밝혀졌다. 다음 날 시스템을 고치기로 하면서 다들 더 늦지 않고 퇴근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제대로 걷기도 힘들어서 버스 정류장에서 한참 서 있었다. 긴장감이 가시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 걸리는 퇴근길 동안 나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이런 불안정한 시스템이 있는 곳에서 내가 제대로된 업무를 배우고 성장할 수 있을지 가늠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친구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내 고민을 들은 친구는 나를 매섭게 몰아부쳤다. 징징거리지 말라는 식이었다. 짧은 순간 쏟아진 많은 말들 중에 묵직한 한 방이 있었다. 네가 사회를 알아? 그만 두면 언제 일을 구하고 언제 일 하고 언제 경력 쌓을 건데? 사회생활이 그렇게 만만해? 나는 조용히 컴퓨터를 껐다. 이불을 머리 높이 올려 덮었다. 친구는 취업한 지 3개월 차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속상한 일이 있거나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난 뒤면 으레 세상 불만을 털어놓았다. 니들이 사회를 아냐. 사회에 나가서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 부모님은 사회와 관련한 훈계를 버릇처럼 했다. 몇 십 년 동안 부딪치며 견뎌내고 버티고 이겨온 부모님의 훈계를 취업 3개월 차 친구에게 들었을 때, 나는 가슴이 너무 아팠다. 내 감정을 보다 고급스러운 단어로 표현할 줄 알게 된 나이였으므로, 비참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직장에서 느낀 수치심보다 친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모욕감을 느꼈다. 단어 하나 떠올리면 숨이 막힐 정도로 괴로웠고, 한 문장을 완성한 채 떠올리면 숨이 가빠질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말은 손을 더럽히지 않고도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 모욕을 주는 것이 그 방법이다. 삶의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는 분명, 누군가에게 모욕을 주는 것이다. -P. 51

모욕, 혐오, 수치심 등 마이너스 감정들은 감정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감정(emotion)에는 이미 운동(motion)이란 말이 포함돼 있다. 운동하는 감정은 몸과 정신 모두에 작용한다. 앞에서 살펴봤듯 괴롭힘 피해자가 겪는 고통 중 대표적인 증상이 심신증이다. 고통스러운 감정이 몸에 각인된다는 말이다. P- 133

피해를 인정받고 피해자로서 존중받기는 아주 힘들다. 피해자는 오해를 받거나 왜곡되기에 딱 좋은 위치다.

 

'별것 아닌 일로 징징거린다.'

'과민반응이다.'

 

피해자로 인정받으려면 무시와 비웃음의 관문도 통과해야 한다. 피해자가 정작 원하는 인정과 사과는 희미해져버린다. 인정하고 공감하는 듯 보이는 쪽에서도 상처를 주기 쉽다.

 

'네가 피해자인 건 알겠는데, 얼른 잊어버려.'

'이게 다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그 뒤로 친구에게 연락 한 통, 문자 한 통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동창으로부터 친구의 소식을 들었다. 친구가 내게 많이 미안해 하더라- 고 전했다. 처음엔 고마웠다. 미안해한다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멍청했다. 내게 그토록 미안해 하는 친구는 정작 내게 사과 한 마디, 연락 한 통 하지 않았다. 그래놓고 주변 이들에겐 내게 한 폭언을 빼놓고 제 입장만 설파하고 다녔다. 그 친구는 뭐가 그렇게 두려웠을까. 나는 그 누구에게도 입 열지 않았는데.

 

나는 직장을 옮겼다. 출퇴근 거리가 멀어서 하루에 자는 시간이 5시간이 못 되었지만 훨씬 나았다. 적어도 시스템 오류로 원성 들을 일은 없었다. 그것만으로 든든한 터라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나는 금세 사장의 신임을 얻었다.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한창 업무를 배워가기에 정신 없던 어느 날이었다. 직장 선배 A가 다른 선배 B와 C, D를 조심하라고 했다. 나는 무슨 말인지 몰라서 A 선배를 쳐다만 보았다. A 선배가 말했다. 너 들어오기 직전에 있던 애가 일을 잘했거든. 사장도 무척 예뻐하고. 그래서 저 선배들이 엄청 갈궜어. 결국 그만뒀잖아.

그때부터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기가 걸핏하면 불려 가 혼나고 있었다. 사무실 안에서 파벌이 생성되어 있었다. 알게 모르게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흘렀다. 나는 조금씩 불안해졌다. 불안감은 금방 몸으로 나타났다. 웬 잡음이 들렸다. 처음에는 짧게, 그 다음은 보다 길게. 빈도가 잦아졌다. 머리가 아플 때도 있었다.

 

괴롭힘은 표적이 된 사람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 당하지 않은 목격자(방관자)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인격살해를 목격하면서 괜찮을 리 없다. '내가 아니어서 괜찮다'는 안도는 짧고 '다음은 나 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길다. -P. 123

 

병가를 내고 쉬었지만 몸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입사 동기가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다음은 나였다. 나보다 경력이 낮은 사람도 없었고, 다음에 들어올 사람은 언제가 될지 몰랐다.

결국 도망쳤다, 나는.

 

이런 식의 정신적인 폭력은 소량의 독이 담긴 음식을 매일 먹는 것과 같다. 한두 번은 몸이 정화해낼 수 있다. 그러나 독이 오랫동안 몸속에 쌓이면 나중에는 쓰러질 수밖에 없다. -P. 103

 

다음 회사는 회사 소개부터 남 달랐다. 딱딱한 기업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친근한 분위기를 풍겼다. 가족 같은 회사라고 했다. 존중을 최우선하기 때문에 존중을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했다. 구절구절이 단비 같이 느껴졌다.

나는 기대에 들떠 있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출근 전날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아서 뜬 눈으로 보내야 했다. 한숨도 자지 않는 바람에 너무 빨리 출근을 해버렸다. 좁은 사무실에 소규모 인원이지만 딱 좋았다.

퇴근 시간이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나는 퇴근 5분 전에 책상을 정리하다 멈칫했다. 아무도 집에 갈 준비를 하지 않았다. 나는 은근슬쩍 펜을 책상에 내려놓고 모니터만 뚫어지게 보았다. 내가 할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가겠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 누구도 퇴근을 하지 않아서였다. 누군가는 인터넷 서핑을 하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신문 기사를 읽고 있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먼저 가겠다고 인사했다. 다들 잘 가라고 인사했다. 괜한 기우였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향했다. 뜬 눈으로 보낸 탓에 온 몸이 피곤했다. 조는 바람에 열차도 놓칠 뻔했다. 다음 날 대외 홍보 SNS에서 새로온 과장님이 자진해서 밤 늦게까지 야근하고 갔다, 멋지다는 식의 칭찬이 멘션되어 있는 걸 보았다. 그날도 역시 난 할 일이 없었다. 전날처럼 다들 각자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업무를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나는 괜히 빈 메모장에 뭐라도 쳤다.

그리고서 회식을 가야 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회식을 했다. 상사는 회식 자리에서 타 팀이 빨리 오지 않는다고 성을 냈다. 성을 내고 내다 휴대전화를 던졌다. 타 팀이 합류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들은 웃고 떠들었다. 웃음이 나오지도 않는 농담을 잘도 웃으며 주고 받았다. 술이 썼다.

 

회식이 문제인 게 뭣보다 다들 장시간 노동하느라 시달리잖아요? 그럼 일 마치고는 집에 가서 좀 쉬고 싶은데 회식까지 하면 자기 시간을 다 뺏겨요. 상사들이 자주 '회식도 일의 연장이다!' 그러잖아요. 정말 그래요. 회식 자리에서 상사를 직접 대면해야 하니까 업무 못지 않게 피곤하죠. -P. 76

 

다시 귀가 말썽이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병든 병아리처럼 꾸벅꾸벅 졸다가 헐레벌떡 환승하러 뛰쳐나가기 일쑤였다. 사람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좌석 너머로 그들의 뒤통수가 비쳤다. 그 사이 사이에 내 얼굴이 몇 겹으로 번져 보였다. 피곤에 절어 있는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나, 왜 이렇게 망가진 거지?

 

'망가졌다.' '망가뜨렸다.' 물건에나 쓸 수 있는 말이 사람에게 쓰이는 경우가 있다.

드라마의 복수전이라면 이 말에 악인을 응징하는 쾌감이라도 있지만 현실에서 망가지는 쪽은 피해자로 '만들어진' 사람이다. 망가지는 과정에서 물건은 대응하지 않지만, 사람은 저항하고 만들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더욱 상처를 입을 수 있다. -P. 110

 

나는 될 수 있는한 도망치고 싶었지만 안락한 선택은 아니었다. 나는 성인이었고, 그말은 책임이 점차 커진다는 의미였다. 내게는 생존이라는 커다란 책임이 주어져 있었다. 방황 끝에 결단을 내렸다. 비정규직으로 일을 옮겨다녔다. 급여는 적고 일은 고되었다. 불러주는 곳은 어디든 가야했다. 출퇴근 비용을 제외하면 얼마 남지 않는 돈을 벌러 출근 시간만 두 시간 반이 넘는 곳으로 가기도 했다. 그래도 단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으니, 얽힐 필요가 없단 점이었다. 나는 떠날 사람이었다. 그들도 알고 나도 알았다. 그 점이 나를 멸시할 핑계가 될 때도 있었다.

 

일하려는 동기와 일에서 얻는 만족은 연결된 문제다. 일에 덜 만족할수록 자기 과제나 조직의 목표, 둘 다에 뜨뜻미지근해진다. 움츠러든 피해자는 주도적으로 일할 의사를 내비치지 않거나 중요한 결정을 하려들지 않는다.

괴롭힘(특히 성적 괴롭힘) 피해자는 상사나 동료에게 지켜왔던 의무를 더 이상 내켜하지 않는다. 자발성과 헌신성이 줄고 '생존 수준', 즉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준의 일 말고는 연루되려고 하지 않는다. -P. 119

 

콕 집어 말할 수 없다. 언젠가부터 내 마음에 분노가 쌓여갔다. 분노를 꺼뜨리고 싶어서 해결책을 찾아보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모든 것은 다 아는 이야기만 했다. 알고 있고, 알고 있는 방법으로 해결하라고 한다. 그게 안 되니까 분노가 쌓이는 건데, 계속해서 울분이 쌓이는 건데 알아주지 않았다.

 

사회는 빼놓고 개인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을 흔히 자기계발로 화려하게 포장한다. 자기계발론은 감내를 열정으로 칭송한다. 즉 견뎌야 하는 것을 '즐기라'고 말한다. 자기 의심을 극복하고 낙천적인 승리자의 성격을 개발하라고 한다. 자신을 그런 식으로 책임지고 관리, 경영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P. 175

 

강의를 들으러 가 보고, 책도 읽어 보았지만 해결책은 없었다. 답을 알고 싶어서 발버둥을 치는데 답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저들도 모르는 게 아닐까. 그래 그들도 모르는 거야. 나는 무시하기 시작했다.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점차 영역을 넓혀갔다. 내게 주어졌던 잣대를 되레 세상에 꽂았다. 내가 받은 편견과 비난을 고스란히 돌려주려고 했다. 정말로 엉망진창이었다. 길에서 내 발을 밟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 대해 외견만으로 평가를 하고, 예의 없는 아르바이트생을 보고 속으로 훈계를 했다. 웃긴 건 편견으로 이루어진 평가와 훈계가 죄다 내가 당한 불합리였던 것이다.

 

'내리 갈굼'으로 표현되는 일터괴롭힘은 강자로부터 받는 모욕을 약자에게 분풀이로 분출하는 번지수를 잘못 찾은 폭력인 경우가 많다. 약자에 대한 분풀이는 괴롭힘의 고약한 동반자다. -P. 140

 

갈등이 생겨났다. 이러면 안 된다는 내 도덕적 가치와 내가 당하면서 학습하고만 불합리한 경험들이 자꾸 부딪쳤다. 나는 섣부르게 사람을 판단하려고 들었고, 동시에 윤리성을 앞세워 어떻게든 바로 잡으려고 노력했다. 끝없이 갈등을 빚는 통에 정신이 사나웠다. 가끔 어떤 게 진짜 내 진심인지 판단되지 않았다.

나는 자꾸 나를 의심했고, 나를 의심하는 나를 의심했다. 나를 의심하는 동안 나는 나를 타자로 보았다. 나는 나인지 타자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나는 정말 나인 걸까. 혼란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또다시 고립되어 가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여기까지 정리해볼까 한다. 이 글을 쓰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그만큼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이 책을 혐오했다. 그저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싸웠다. 그렇게 판단내리면 안 된다고. 내 가치관이 이번에도 편견을 이겼다. 책을 펼쳤다.

 

오로지 해결책만 원하면서 분노할 거라고 생각했던 내 편견은 깨졌다. 고맙다, 깨뜨려줘서. 읽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나의 과거가 생각나서? 아니다. 과거는 생각나지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거리조절이 되어서다.

나는 모든 현상을 파악했다고 착각해왔다. 그런데 직면한 현상을 한 꺼풀 벗겨내면 다른 세계가 열린다. 순간 엄청난 압박감에 압도당하고 만다. 한 꺼풀을 벗겼다는 건 빙산의 일각을 보았다는 뜻이다. 즉 얼마나 많은 껍질을 벗겨야 구(球)에 도달할 수 있을지 짐작가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날을 거쳐오며 해결책을 간절히 바랐다. 외부에의 도움을 청했지만 소용없었고, 내부로의 단단함을 권유 받아서 노력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이런 내가 오로지 해법만을 원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을 보고 생각이 바뀐 건 말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걸 깨달아서다. 나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받은 괴롭힘이 무엇인지, 어떤 식의 괴롭힘인지, 보이지 않는 폭력을 언어로 구체화해서 전달해야 한다. 그래야 타자와 공감할 수 있고, 타인으로부터 연민을 부를 수 있다.

 

이 사회의 누구도, 어떤 약자라도 무릎 꿇림을 강요당해서는 안 되는 인권이 있다는 사실을 옹호하는 책임이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를 읊는 데 그치지 않고 붕대를 가져오든 의사를 부르든 고통을 약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책임이다. 일터괴롭힘 피해자가 가해자의 말에 베이고 있을 때, 옆에서 '그만하세요' '정도가 지나칩니다' 하며 개입하고 피해자에게 지지를 보이는 책임이다. -P. 144

연민은 독일어로 '함께(mit)' '고통을 느낀다(leiden)'는 뜻과 비슷하다. 연민을 '불쌍하다'는 말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불쌍하다는 말을 평등의 입장에서 말할 때는 '세상에 고통받는 것은 다 안타깝고 불쌍하다', 나도 불쌍하고 너도 불쌍하니 '서로를 안쓰럽게 여기자'는 의미다. -P. 145

 

법적으로 보호 받을 수 있는 분명하고 확실한 무언가가 생기면 좋지 않을까, 하고 고민한다. 쉽지 않은 길이다.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냉철하면 되레 현실을 읽어내지 못할 때가 있다. 지나친 셈법은 현실의 부조리를 계산하지 못한다. 안타깝다.

 

괴롭힘 관련법을 갖추는 것은 일부 국가들이 이미 취하고 있는 대응이다. 일터괴롭힘만을 위한 새로운 법을 만들거나, 노동 건강과 안전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거나, 법원 판례로 일터괴롭힘 피해를 인정하는 것이 대표적인 법적 대응이다. 그런데 법이라는 것이 설계할 때 예상한 대로 작동하는 것도 아니고 기대 수준이 다르기에 낙관적인 평가와 비판적 평가가 공존할 수밖에 없다. -P. 217

 

이 책이 나를, 나아가 우리 모두를 바꿀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처를 보듬어주지도 않는다. 다만 변화할 계기를 건넬 뿐이다. 상처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게 할 뿐이다. 끝에 이르러 우리가 해야 할 아주 작은 일을 알려준다. 의심하는 거다. 그리고 질문하는 거다. 무엇을? 우리가 처한 상황을. 우리가 헤쳐나가야 할 현실을.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현재를, 우리가 처한 상황을. 계속해서 의심하고 질문해야 한다. 나라는 개인이, 나아가 너에게, 앞으로 당신에게, 그렇게 우리에게 전해져서 바꿀 힘을 만들어야 한다. 물고, 물어뜯기고, 물어뜯기는, 사냥터에서 함께 벗어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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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바디 원츠 썸!!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 조이 도이치 외 출연 / 콘텐츠게이트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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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아리게 하는 단어들이 있다. 숨 막히게 버거워서 심호흡을 길게 해야만 소화할 수 있는 그런 단어들, 첫사랑이 그럴지도 모른다. 첫사랑이 시작되던 때의 우리는 어땠을까. 나와 너는 어떻게 우리가 되었나. 우리는 풋풋했다. 서툴렀다. 그래서 싱그러웠다. 그 자체가 아름다웠다. 우리라는 존재가 그 자체로서 빛나는 순간이었다. 청춘이었다.

 

살아가면서 배워야 할 것들이 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마다 잊지 못할 것들이 있다. 청춘이 그렇다. 청춘이란 어쩌면 꽃잎이 저버린 후에야 앓고 마는 뒤늦은 열병일지도 모른다. 청춘 안에 있을 때에도, 청춘을 떠나보낼 때에도, 청춘과 멀어진 때에도 모두 다 청춘을 앓는다. 지독할 정도로 따뜻한 봄날이었기 때문이다.

종종 그리운 시절에 대해서 묻곤 한다. 나의 시대에 대해서 넌지시 질문을 던지고 나면 눈을 찌푸리고 만다. 자세히 떠오르지 않아서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청춘을 보내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다시 묻는다. 나의 부모님의 시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 그 시절은 어땠을까. 아직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도로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땅에 닿을 듯이 낮은 차체에 올라탄 채 얼굴만 덩그러니 드러낸 운전자가 흙먼지를 이끌며 막의 끝으로 사라진다. 흙먼지가 벗겨지고 저 먼 지평선이 뚜렷해지며 부모님의 청춘시대가 필름사진처럼 빛바랜 형상으로 나타난다.

 

내가 세상에 울음을 터뜨리기 훨씬 이전의 시절임에도 낯설지 않은 것은 모든 기록이 절절하게 남아 있어서다. 표지가 누렇게 뜬 사진앨범에서 심심찮게 접해온 시절. 드라마와 영화에서 마주할 수 있는 시절. 그 시절의 청춘은 가까이에 있다.

 

에브리바디 원츠 썸!!(Everbody Wants Some!!)이 미국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간 청춘물인데도 낯설지 않은 건 이처럼 청춘이란 단어에 담긴 의미가 전 세계적으로 같은 탓일지도 모른다.
직설적인 원색 계통의 의류, 허리를 꽉 졸라맨 허리띠, 뒤집어쓴 모자-홀드 사이로 머리카락을 빼주는 센스를 지녀야 진정한 패션리더인 법-와 알이 큰 안경까지 패션에 포인트를 주는 아이템이 그 시절 필수품이던 시절이 낯설지 않은 건 너무나도 많이 접해본 과거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과거라는 단어가 나오는 그때부터 어딘가 모르게 그리움이 묻어 나온다. '에브리바디 원츠 썸!!'은 그립기 때문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영화인 셈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마냥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영화는 사람을 꽤 전투적으로 만드는데, 미칠듯한 지겨움이 훅 치고 나오기 때문이다. 영화 중반에 이르러 그리운 과거와 관련된 소품들이 제 역할을 끝내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지루함이 쏟아진다. 이는 영화가 줄거리에 충실해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줄기는 '개강 전까지 3일 15시간! 미친 듯이 즐겨볼까?'라는 문구에 있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이 영화는 3일 15시간 동안 미친 듯이 노는 이야기이다. 한마디로 큰 줄기가 되는 사건이 없다. '삐―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어떤 어떤 일이 일어나서 어떻게 어떻게 흘러 어떤 어떤 일과 마주쳤는데……'처럼 빠져들게 할만한 이야깃거리가 없다. 단연 사건이 없으니 갈등이 없다. 그게 청춘이 가진 무서운 성질이다. 청춘이란 그런 거다. 흐름의 안에 있을 때 모든 일이 사건이자 갈등으로 불거진다. 일분일초가 더디게 느껴지고 지루하다. 때론 과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모든 건 후에야 재정립이 가능하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한가롭고 유쾌한 이벤트로 남기 마련이다. 이들(영화 속 등장인물)에게 3일 15시간은 가장 큰 갈등이자 사건이며, 지루하고 고루하지만 필요한 전야제인 셈이다.

 

전야제에 관한 불편한 사실이 영화의 단점을 부각시키는 데 다음과 같다. 하나, 전야제는 사람을 들뜨게 한다. 하나, 전야제로만 축제가 끝나버린다. 그러니까 이야기가 이제 시작되려나 싶을 때 영화가 끝나버리고 만다. 맥이 탁 풀리는 거다. 마치 콜라캔을 따자마자 거품이 캔을 흥건히 적실 정도로 터져 나오고, 수습하기도 전에 탄산이 푸시시 맥 빠지는 소리를 내며 여기저기 튀다 잠잠해버린 것처럼 맥이 빠진다. 한바탕 소동 끝에 마시는 김빠진 콜라의 맛을 아는가. 웁스.

하지만 김빠진 콜라에도 강점은 있다. 아주 진한 단맛이 남는 법. 김빠진 콜라만큼 단맛이 혀끝에 오래 맴도는 음료도 없다. 즉 이상하게도 여운이 남는 거다. 기억에 남을 만한 사건도 없고(그저 미친 듯이 노는 것뿐), 영화의 절반 이상이 의미 없는 헛소리(끝나고 기억나지도 않는)로 이루어져 있는데도 묘한 여운이 남아버린다.
그건 보는 이가 플러머의 말("그래도 올해 재밌겠어.")에 동의해서다. 눈을 감는 제이크의 얼굴에 편한 미소가 떠오를 때 비로소 알게 된다. 이후에 일어날 일들이 무엇인지. 전야제가 끝난 후 펼쳐진 축제를 우리는 몸소 기억하고 있다. 청춘이니까. 말할 수 있다. "그래, 그해는 재밌었어."


청춘은 과도기일지도 모른다. 아이도, 성인도 아니라서 서툰 행동 하나, 하나가 혁명인 시절, 우리는 청춘을 아름답게 극복했다.


이제 사진앨범을 덮는다. 그래도 난 모자를 뒤집어 쓰진 않을 거야.

 

"난 신들이 시시포스에게 집중할 걸 줬다는 게 축복이라고 생각했어.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과제를 준 거잖아. 남들 눈에 부질없어 보일지라도 노력할 일이 있는 건 축복이지."

"웃기긴 해. 산꼭대기로 바위를 올려도 올리는 족족 떨어지고. 근데 인생이 다 그렇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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