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1.19.금지금으로부터 5년 전이니까, 18살 때의 기록.언어란 실용적이라기보다는 미적인 도구이다.꽉 차 있는 사람보다 텅 비어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왜지?˝당신도 알다시피 텔레비전은 많은 경우 사람들의 유일한 화제예요. 그래서 모두가 같은 걸 보죠. 따돌림 당하지 않고 함께 나눌 뭔가를 갖기 위해.˝˝지난 전쟁 때, 저항을 선택한 사람들은 그것이 힘겨우리라는 것을, 나아가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들은 망설이지 않았죠. 이것저것 재보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어요.˝˝사회를 변화시킬 계획이라도 있나보죠?˝ 사내가 빈정거렸다.˝아뇨. 전 경멸이 판치는 곳에 자존심과 존중심을 되살려놓고 싶을 뿐이에요.˝오래 전에 읽은지라 구체적인 내용이 기억나진 않지만, 당시 낙서하듯 적어놓은 흔적을 따라가다보니 이 책의 어느 꼭지에서 매력을 느꼈었는지는 기억이 난다. 역할극에 충실했던 교도소 간수와 매력적인 여주인공 사이에서의 대화가 마음을 때렸던 책. 고등학생 때 폭 빠졌던 여류작가 중 탑에 든다. 아멜리 노통브.
1.˝정릉에서의 생활은 참으로 힘든 나날이었다. 새로운 좌절과 권태와 긴장과 허탈 속에 하루하루 몸이 붓고 마르는 연속이었다. 아무 기한도 약속도 없는 오늘과 내일과 그리고 모레가 모두 한 엉킴, 말하자면 시간이 사방에 날리던 때였다. 나는 그 때까지 내가 몸담고 있던 모든 것에서 떠나 나 자신 속에 몰두했으며, 그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그러면서 이전까지 분명했던 것들이 모두 모호해지고, 모습들이 드러나는 듯하던 질서들 뒤에는 모르는 그림자들이 어리기 시작했다. 나는 종일 그 그림자들을 헤치고 다녔다. 그림자들은 어린 시절 같기도 하고 혹은 자식들 같기도 하고, 혹은 죽음 같기도 했다.아마 이 글을 처음 보고 읽어야겠다,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2. 한창 잘 나가던 시절 갑자기 찾아온 식도암.˝늘 죽음을 느끼셨다면 그 공포를 어떻게 극복하셨어요?˝라고 묻는 오효림씨의 질문에 대한 김석철씨의 답은 이렇다.˝죽음을 늘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없었어요.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입니다. 제가 꼭 그런 기분이었어요.죽음 앞에서 인생을 돌아보니 정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던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수긍이 갔던 이유는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책을 통해서나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3.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할 때, 새 학기 수업을 앞두고 식도암이 재발한 걸 알았다고. 방사선 치료를 받는 동안 학생들을 열흘간 한국에 오게 해서 수업을 진행했가는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 책임감이든 집념이든, 하기로 한 일은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을 닮고 싶었다.
˝열두살 이후로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로 첫문장을 여는 책. 은희경씨의 후기작부터 접했던 나는 이 책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문장이 조금 많이 낯설었다. 하지만 그녀의 다른 어떤 책보다 더 좋았다.˝내가 왜 일찍부터 삶의 이면을 보기 시작했는가. 그것은 시작부터 내 삶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마 그 때부터 내 삶을 거리 밖에 두고 미심쩍은 눈으로 그 이면을 옅보게 되었을 것이다.˝
˝눈을 뜨니, 또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문을 열고, 비에 젖어 칙칙한 낯익은 거리를 내다본다.소리를 이루지 못한 희미한 소리, 비와 안개가 섞인 차갑고 깊은 냄새. 밀라노의 냄새.˝여행을 떠나기 전에 rosso를 읽고, blue를 들고선 여행을 떠났다. 네팔과 유럽 여러 나라를 다니는 동안에도 다른 책으로 연명하다 피렌체에 다다를 즈음에서야 쥰세이를 찾아가며 읽었던 기억. 시간이 꽤 지난 이후에도 아오이와 쥰세이를 생각하면 마음 한켠이 지릿한 걸 보니 내게 특별한 책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겠다. 에쿠니 가오리를 좋아하지만 냉정과 열정사이는 그녀보다 조금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