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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새로운 시작 - 문명 전환과 다성적·민중적 리얼리즘의 감각과 서사
심광현.유진화 지음 / 희망읽기 / 2022년 3월
평점 :
‘생태적 회화’의 시작
이 책은 한 화가의 얘기로부터 시작된다. 30여년 전에, 좁은 무대만을 문제삼는 모더니즘과 넓은 바깥 세상만을 문제삼는 리얼리즘에 의문을 품으며, 극장 자체와 그리는 행위에 집중하겠노라고 '그림의 시작'을 선언한다. 그러나 그동안 지구생태계의 위기와 양극화로 인한 사회생태계의 위기라는 거센 파도에 휩쓸려 인간생태계의 분열마저 겪으며 떠밀려 나가기만 했다. 이러한 문명의 이행기에는 역사지리적 환경 변화에 대한 인지생태학적인 작용과 반작용의 변증법을 살펴봐야 한다고 저자는 상세한 이론과 다이어그램을 통해 독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문명의 이행기야말로 역사적으로 살펴보더라도 정치, 사회,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며, 현재 '과학의 세기'라고 지칭하는 20세기, 21세기 다음으로 '예술적 자기인식'의 세기가 열리게 된다는 것을 실증적 사례를 통해 전하면서, 지금이 '그림의 새로운 시작'을 할 때라고 강조한다.
미술하는 사람들은 현재의 미술시장(아트페어 미술)이 극도로 상업주의에 물들어 '일러스트 페어'와 다를 바 없다고 한탄하곤 하는데, 이 책에서 일목요연한 설명을 통해 그 원인을 규명해주고 있다.(39-40쪽) 그것을 읽으면서 이 책은 미술대학에서 교재로 써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대학에서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를 굳이 실기 시간의 앞 부분을 할애해 강독했는데, 그림이 감각과 연결되는 부분을 해명해주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미술 이론서들은 저널리즘적인 미술사와 더불어 작가와 저자 개인의 미학적 태도가 전부인데 반해, '감각의 논리'는 실제 그림의 이론서가 되었으나, 그렇다고 미술전반의 향방에 관해 말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림을 그릴 줄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는지는 여전히 물음표가 남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우리에겐 이미 40년 전에 '민중미술'이라는 커다란 이정표가 있었다. 민중미술의 주 특징인 그림-이야기가 대안적인 문명 전환의 주요한 실천방법이 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림(과 이야기의 결합)의 새로운 시작'이란 이런 작가들이 수십 년 동안 암묵적으로 실천했지만 그 의미가 충분히 사회화되지 못한, '그림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시동을 걸었던 '감성적 리얼리즘'과 '넓은 세상'의 이야기를 그린 '민중적 리얼리즘'의 풍부한 역량들을 명시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결합해 보자는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꾼 유진화가 연결자로서 등장한다. 이미 2020년 『인간혁명에서 사회혁명까지』, 2021년 『대중의 철학이 된 영화』에서 가정주부이자, 필자의 아내로서-'암묵지'의 참가자로서-무겁고, 맵싸한 글맛을 선사했던 유진화는 작가 26명의 작품 하나 하나에 이번에는 유려한 문장으로 뜻깊은-최초의 관객 참여자로서-'미술담론'에 참여한다.
예술의 상품화가 가속화 되면서 "고급예술과 대중문화 전반에서 인간의 창작 기능의 상당 부분이 배제되기 시작하고 있다."(63쪽)고 책에 나오는데, 나는 '배제'라는 단어가 특히 눈에 꽂혔다. 현재 작가들은 전시를 하든, 안 하든, 실제로 배제 되는 경험을 언제 어느 곳에서나 하고있다. 작가 자신이 배제 되든, 작품이 배제 되든 말할 나위없이 씁쓸한 경험이다. 8-90년대 혁혁한 민중미술 비평가였다가, 한예종 영상이론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계의 가장 진보적인 학자로 맹활약을 해온 심광현은 한번도 문화현장을 떠난 적이 없지만, 25년만에 다시 미술평론가로 돌아온다.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온 역사 지리-인지생태학과 다중지능 네트워크가 배제의 굴레를 쓰고있는 현대미술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지 않을까 미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기대가 크다. 나는 최근에 개인전에 출품할 그림들을 끝내고, 담담한 기분으로 이 책을 읽은 후, 새로 작은 그림 하나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림의 제목이 <먼 곳으로부터>이다. 이 그림을 시작하며 여태까지 사로잡혀 있던 ‘감성적 리얼리즘’과 ‘개념적 회화’를 넘어 심광현이 노상 강조하고 있었던-이 책에서도 줄곧 얘기하는-‘생태적 회화’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그것은 역사적 시공간을 가로질러 지리-생태적 깨달음의 바람을 가슴으로 맞는 그런 기분을 주었는데, 20여년 전, 경복궁 근정전 앞에 관광객과 아이들이 바글바글 모인 가운데, 나의 어린 두 딸이 눈앞을 응시하는 장면이다.
그림(과 이야기의 결합)의 새로운 시작‘이란 이런 작가들이 수십 년 동안 암묵적으로 실천했지만 그 의미가 충분히 사회화되지 못한, ‘그림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시동을 걸었던 ‘감성적 리얼리즘‘과 ‘넓은 세상‘의 이야기를 그린 ‘민중적 리얼리즘‘의 풍부한 역량들을 명시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결합해 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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