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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밥 공주 ㅣ 창비아동문고 249
이은정 지음, 정문주 그림 / 창비 / 2009년 5월
평점 :
달리 보기와 같게 보기
『소나기밥 공주』, 이은정 글 정문주 그림, 창비
책여우. 2009.09.11. 한양하
설화에서 금기는 위반됨으로써 금기다운 가치를 가진다. 금기가 금기로만 존재한다면 금기는 관습이 될 것이다. 일상에서 금기는 금지로 드러난다. 우리는 어른은 이래서는 안 돼, 어린이는 이래서는 안 돼라는 금지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어른들은 어른의 권위를 잃고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고, 아이들은 순수함을 잃고 사악해서는 안된다. 그런 생각 속에서 살아왔던 관습은 어른을 옥죄고 아이들을 옥죈다. 『소나기밥 공주』(이은정 글, 정문주 그림, 창비, 2009)는 어른과 어린이에 대한 고정관념을 한겹 벗겨낸 작품이다. 그러나 작가가 주인공의 행위에 도덕적 잣대만 들이대지 않았다면 끝까지 생생한 인물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기도 하다.
1. 이름, 달리 보기
『소나기밥 공주』주인공은 안공주다. 공주이지만 공주가 아닌 아이다. 알콜중독자인 아빠는 공주가 태어났을 때 왕이 된 것처럼 기뻐서 공주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공주는 공주답게 살아보지 못한다. 지하방에서 여덟 살 때부터 집나간 엄마를 대신해서 살아야했으며 아버지가 들어오지 않는 날에도 혼자 집을 지켜야 했다. 학교에서 먹는 급식이 하루 가운데 유일한 식사가 될 때가 많은 공주는 밥을 많이 빨리 먹어서 소나기밥 공주가 된다.
공주의 친구는 현미다. 공주의 처지와 대립되는 현미는 쌀 종류의 명칭이다. 현미네 엄마는 음식도 잘 하고 공주가 가면 맛난 음식을 내놓기도 한다. 공주와 현미의 처지는 대립적으로 보이며 공주가 안공주인 것처럼 친구 현미는 따뜻하고 고소한 현미밥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행복한 가정에서 살아가고 있다. 공주와 현미의 이름 짓기는 대조적인 처지에 놓인 공주의 현실을 더 잘 드러나게 한다.
공주의 아버지가 갇힌 공간은 희망의 마을이다. 아버지는 희망의 마을에 갇혀서 공주에게 희망을 주지도 못한다. 아버지에게 희망이었던 공주와 격리된 공간은 반어적 효과를 내고 있다.
2. 어른과 아이, 달리 보기
『소나기밥 공주』에서 주인공 안공주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다. ‘희망의 마을’에 갇혀 사는 공주의 아버지에게 희망은 공주다. 그러나 재활원에 갇혀 공주를 만나지도 못하고 공주의 안부도 모르며 공주의 생계에 도움조차 되지 못한다. 한마디로 무능력한 아버지다. 양육에 대한 책임도 저버리고 오히려 공주에게 보호받고 싶어 한다. 이는 공주와 아버지의 편지에서 드러난다.
공주의 편지
“아빠, 내 걱정은 하지 마. 며칠 뒷면 보조금도 나오잖아.”(47쪽)
아빠의 편지
“내가 또 술 마시면 네 딸이다!”(31쪽)
공주는 아빠의 편지를 받고 의연하다. 다시 술을 마시면 ‘네 아들이다’에서 ‘네 딸이다’로 바뀌었을 뿐이니까. 오죽하면 재활원에 들어가 자기를 구해달라고 초등학교 6학년 딸에게 편지를 보냈을까? 결국 공주는 아빠의 재활원까지 찾아가지만 만나지도 못하고 모셔오지도 못한 채 혼자 돌아온다. 이미 면회시간은 지나갔고 공주는 오히려 양육을 받아야 할 존재였기에 아빠의 구출자가 되지 못한다. 희망의 마을에 갇힌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서 희망을 남길 수만 있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모두 어른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을 갖추지 못했다. 아버지는 양육자가 아니며, 집주인 김씨는 자기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이기적이고, 의심이 많으며, 탐정놀이를 하다 민망함을 당하는 인물이다. 팽여사는 공짜 좋아하고 자기가 본 손해는 몇 배의 보상을 받아내야 속이 시원한 드센 인물이다. 한마디로 ‘어른들이 뭐 이래?’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들도 변화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들의 변화는 성숙하는 삶이며, 어른도 자기 삶 속에서 지속적인 성장을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아버지는 알코올 치료를 받으면서 “아빠는 여기서 조금씩 건강을 되찾고 있어. 괴물 안 본지 좀 됐다. 아빠 꼭 건강해져서 돌아갈게”라며 헛된 말을 하지 않는다. 팽여사는 자기 손해 보지 않으려는 드센 인물에서 마음속에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구하는 측은지심이 있음을 보여준다. 대문간에 쓰러진 공주를 병원으로 데려가며, 공주가 아빠 없이 혼자 지낸다는 것을 알자 공주를 안쓰럽게 여긴다. 물론 공주에게 병원비 영수증을 내밀며, 해님마트로 끌고 가 범인임을 자백하게 하기도 하지만 공주에게 죽을 끓여주며, 마트에서 전단지 돌리는 일도 방학 때 할 수 있도록 조정해 준다. 의심 많은 주인 김씨는 팽여사와 공주가 고기를 구워 밥을 먹도록 하기 위해 옥상 문을 열어준다.
『소나기밥 공주』에서 어른들은 변화하고 성장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 주인공 안공주는 혼자서 밥해먹고 학교 다녀도 친구들에게 기죽지 않는다. 소나기밥을 먹는다고 놀림을 받아도 꿋꿋하게 먹고 더 먹기도 하며, 친구 현미를 집으로 데려오기까지 한다. 아빠를 구출하기 위해 두 시간이 넘는 곳을 혼자 찾아가기도 하며, 밀린 방값 때문에 주인에게 적당히 눈치를 볼 줄도 알며, 옆집 104호 총각이 주유소에서 일하면서 기름을 더 주는 것을 알고 이천 원을 더 주고 오기도 한다. 공주는 어른답게 행동한다. 아이로 살아갈 수 있는 현실이 아닐 때 아니는 어른이 되어 자기를 책임지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보육원에 가는 것보다 혼자 사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하는 작은 어른이다.
3. 욕망과 죄의식, 같게 보기
『소나기밥 공주』에서 이름의 설정과 어른과 아이의 역할에 대한 재고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어른도 성장할 수 있고, 아이도 어른 같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공주의 허기진 욕망을 지나친 죄의식으로 다루는 것은 공주라는 인물의 성격부여에 일관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공주에게 양육자의 부재는 허기로 나타난다. 늘 배고픈 공주는 아빠를 희망의 마을에서 구출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죽을 것 같은 허기를 느낀다. 그 허기는 텅빈 지하방과 텅빈 기름통과 텅빈 냉장고로 표현된다. 그러나 공주가 202호 팽여사의 배달 물건을 가로채어 거짓말을 하는 순간 냉장고도 가득차고 공주의 뱃속도 가득하고, 지하방은 음식 냄새로 가득 차게 된다.
텅빈 것을 채우고 싶은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허기에 시달리는 공주에게 탈탈 털어서 살 수 있는 것은 콩나물 560원어치였고, 그 콩나물로 끓이고 무쳐서 먹을 수 있는 게 전부다. 그러나 팽여사의 장바구니에 담겼던 것은 오만 원이 넘는 갖가지 음식재료들이었고 미역국, 달걀찜, 해물전을 해 먹을 수 있는 풍요로운 것이었다. 허기를 채우고 싶은 공주의 욕망은 훔친 물건들로 채워질 수 있었다.
공주의 욕망은 채워졌으나 죄의식은 폭식을 불러왔고 극심한 체기로 기절하고 만다. 결국 공주의 폭식은 허기진 욕망을 채울 수 없었고 부도덕한 일을 했다는 죄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공주가 팽여사의 장바구니를 훔치고 지독한 죄의식에 시달리는 모습은 아이가 겪을 시련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도덕적으로 살았던 사람이 한 순간 실수로 자기 인생을 더럽혔다고 생각하는 완고한 죄의식이다. 공주는 누구보다 발랄하고 씩씩하며 자기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작은 어른이었다. 어쩌면 장바구니에 든 재료들로 맛난 음식을 해 먹고 입 싹 닦고 팽여사의 딸 혜민이를 돌봐주고 팽여사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할 수 도 있을법하다. 공주의 폭식을 유발한 죄의식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공주에게 설정된 성격에서는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공주의 죄의식은 작가의 도덕관이이 개입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공주의 존재는 텅빈 냉장고였으며, 희미하게 빛이 나오다 꺼져버린 돼지손전등이었으며 뭉개진 560원어치의 콩나물이었다. 쓸쓸하고 무서운 지하방에서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공주는 자기를 버리고 간 엄마지만 따뜻한 밥을 차려놓고 있기만 하다면 한번에 용서해 줄 수도 있을 만큼의 허기를 느낀다. 누가 공주에게 돌을 던지랴. 그런 공주의 욕망을 죄의식으로 몰고 가는 것은 도덕 교과서적 결말을 예고한다.
『소나기밥 공주』에서 눈여겨 볼 점은 개성 있는 인물이다. 안공주는 씩씩한 아이다. 자기를 구출해 줄 수 있는 어떤 사람도 없을 때도 공주는 작은 어른으로 당차게 살아간다. 물론 욕망을 죄의식으로 고리짓지 않았다면 공주는 더 매력적인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팽여사도 겉으로 볼 때는 드센 아줌마의 전형이다. 공짜 좋아하고, 시비가 붙을 때는 창피한 줄 모르고 소리치고, 손해보고는 못 사는 인물이지만 아이 낳고 사는 여자로 측은지심을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착한 아줌마로 변화하지 않고 자기 소신대로 살아가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