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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해자 1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 북스토리 / 200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소설을 읽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동안 일본소설은 가볍고 작품성도 떨어질 거라는 잘못된 편견도 있었고, 솔직히 말하면 특별히 읽어야할 이유가 없었다. 우연히 도서관에 들렀다가 아무 이유없이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를 집어들고 단숨에 읽고 나서 이런 시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완성도 면에서 그 해에 읽은 소설 중에는 최고 작품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니까. 다음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읽었는데 정말 잘 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세번째 만난 작가가 이번에 나온 <<방해자>>의 작가인 오쿠다 히데오다. 처음 읽은 이라부 선생이 나오는 <<공중그네>>와 <<인더풀>>은 특이하긴 했지만 쉽게 공감이 가진 않았다. 그리고 나서 오쿠다 히데오의 모든 소설들을 출간과 동시에 읽었는데, 고정관념이나 자기 기만을 가볍게 제압하는 그의 소설들 중 <<남쪽으로 튀어>>와 <<최악>>을 읽은 다음에야 작가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방해자>>는 대작이기도 하지만 다른 오쿠다 히데오 소설과는 다르게 매우 진지하고 차분하게 진행된다. 방화 사건으로 소설이 시작되고, 누가 방화범인지 밝혀내는 이야기가 끝까지 계속되지만 조금만 읽다보면 사실 누가 방화범인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방화범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고 왜 방화가 일어났는지도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방화 사건의 중심에 있는 두 주인공인 형사 구노와 주부 교코의 시각을 통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행복을 찾으려고 분투하는 이야기다.
"자신이 어떤 감정에 지배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화난 것도 아니고, 슬픈 것도 아닌, 어쩌면 그것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데 대한 위화감인지도 몰랐다."
구노의 심리상태이자 오쿠다 히데오 소설 등장인물들에게 공통적인 내면 풍경이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안주할 곳을 찾지만 그럴 수 없게 만드는 현실 앞에서 구노는 마음 속에 대피소를 만들어 놓고 장모와 아내인 사나에, 그리고 약에 의지한다. 아내가 죽은 후 장모를 모시고 살려는 그의 소박한 꿈도 용납되지 않으며 현실을 받아들이질 못한다.
교코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갈 곳도 없다. 할 일도 없다. 오직 남편의 체포를 두려워하며, 혼자 흠칫흠칫 놀라며 살아갈 뿐인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증발하면 어떻게 될까."
방화건으로 남편인 시게노리와는 소원해지고 시간제로 일하는 할인마트에서 본의아니게 소위 비정규직 차별을 철폐하고 처우 개선을 주장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으며, 같이 행동했고 그녀를 격려했던 동료들과도 결국 결별한다. 남편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방화를 하지만 이미 멀리 가버린 현실은 돌이킬 수 없다.
한편 불량학생인 유스케는 오쿠다 히데오 소설의 전형적 인물로 미래에 대해 불투명한 젊은 세대를 대표한다. 친구인 요헤이, 히로키와 함께 우연히 휩쓸리게 되는 방화건으로 돌파구를 찾아보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유스케라는 인물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소설에 생동감을 불러 일으키며 방화사건의 시작과 결말에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한다.
작가는 자신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끼는 이 사회의 <방해자>인 인물들을 통해 현실의 벽 앞에서 진정한 개인의 행복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라는 진지하고 매우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결국 그들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지만 처음의 그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현재는 행복을 못느끼지만 나중에 찾은 행복은 그들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들의 불행은 행복을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게 하는 준비과정이다. 방해자 속편이 존재한다면 그 소설에서는 그들이 정말 행복해지길 바란다. 그래야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테니까.
소설에 몰두하게 만드는 흡인력과 작가의 심리 묘사는 여전히 대단하고 인물들 간의 복잡한 얽힘과 그 관계를 통한 자기 정체성의 발견은 이 소설을 단순한 장르소설 이상으로 변모시킨다. 다만 주인공인 구도와 교코의 만남이 너무 짧았고 적었다는 점이 독자로서의 아쉬움이다. 그들이 사랑을 하든 아니면 갈등을 하든 두 사람이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면 좀 더 내 맘이 편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이건 작가에 대한 도전이자 텍스트를 다시 쓰겠다는 지나친 독자의 요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