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브라더
코리 닥터로우 지음, 최세진 옮김 / 아작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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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테러가 일어난다.

공습경보 사이렌과 함께 대피소로 이동하라는 방송이 흘러나오고

마커스와 친구들은 혼비백산이 된 수많은 군중들 틈에 끼여 대피하다

친구 한명이 부상을 당해 피를 흘린다.

도움을 청하러 길가로 나간 이 고교생들은, 순식간에

검은 두건이 씌워지고 손발이 묶인 채, 어디론가 끌려간다.

이들을 기다리는 건 감금과 고문.

이들이 졸지에 테러용의자가 된 이유는, 땡땡이 치고 학교를 빠져나온 거.

땡땡이 친 대가치곤 너무 가혹하다.

 

제목 리틀 브라더를 보고 조지오웰의 소설<1984>빅 브라더를 떠올릴지도.

오웰의 소설이 1940년대에 상상한 공산주의 국가에 도래할 감시사회였다면,

이 소설은 그리 멀지않은 미래에 등장할 자본주의 국가의 감시사회를 그리고 있다.

빅 브라더 vs 리틀 브라더 라고나 할까.

 

911사태 이후, 미국사회는 테러방지란 명분으로

전 국민 감시체계를 강화했다. 일명 애국법.

소설에서도 효율적인 대테러활동을 위해 국토안보부에 막강한 권한을 부여한다.

학생들에게 제공한 노트북 스쿨북은 학생들이 입력하는 모든 단어를 검열하고

의심스런 검색이라 판단하면 국가기관이 추적한다.

학교 복도와 길거리에 수많은 CCTV를 설치하고, 마치 지문으로 신원파악을 하듯 

걸음걸이 패턴으로 누군지 판별하는 인식장치가 달려있다.

 

폭발로 다리가 무너지는 테러가 발생하자 시민들은,

테러방지를 위해서라면 시민의 기본인권마저 국가에 헌납해야 한다는,

권력의 위압에 기꺼이 굴복한다.

스마트폰, 신용카드, 교통카드, 네비게이션...개인사생활이 담긴 모든 것이

감시도구가 된다. 어딜 가는지, 뭘 사는지 모든 정보를 국토안보부가 들여다본다.

국토안보부는 미국 헌법위에 군림하는 듯 초법적 권력으로 격상된다.

애국자임을 인증받기 위해선 사생활과 인권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한가.

자칫하면 사소한 실수로도 테러용의자로 의심받고 끌려갈 수도 있는데.

국가반역자로 몰리지 않기 위해, 시민들은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며

잔뜩 움츠린 채 일상을 살아간다.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가 쓴 <감시와 처벌>에서

판옵티콘이라는 원형감옥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덤이 18세기에 고안한 감시시설이다.

판옵티콘(panopticon)이란 다 본다는 뜻.

나는 니가 무슨 짓을 하는지 다 보고 있다고 겁박한다고나 할까.

 

이 원형감옥은

바깥쪽에 원을 따라 죄수를 가두는 방이 둘러서 있고,

중앙엔 죄수를 감시하는 원형탑이 있다.

감방은 언제나 밝게 유지되고 감시탑은 늘 어둡도록 설계돼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항상 나를 감시할 수 있는 상황.

나는 감시자가 누군지 알지도 볼 수도 없지만,

감시자는 내 일거수일투족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두려움.

이제 죄수는, 감시탑에서 간수가 잠을 자거나 설령 자릴 비우더라도

어둠 속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을지 모르는 고양이 앞에, 얌전한 쥐가 된다.

스스로 감시하는 규율의 내면화가 이뤄지는 것.

 

판옵티콘이 보여주는 감시의 원리가 사회전반으로 스며든 세상.

18세기 원형감옥의 작동방식은 21세기에 전자감시 형태로 진화돼,

온 사회전체를 슈퍼판옵티콘이라는 거대한 감옥으로 변모시킬지도 모를

가능성의 길을 열어놓고 있다.

푸코는 비록 다수가 동의한 제도라도 오류의 가능성이 있으며,

이 제도가 구축한 질서에 무조건 복종을 강요하는 절대권력으로

군림할 수 있음을 일깨운다.

 

올해 초,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진행한 필리버스터가 굉장한 관심을 끌었다.

책이나 해외 뉴스에서 봤던 필리버스터를 우리 국회에서 보게 될 줄이야.

테러방지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이 무제한 토론이 열리는 동안,

연일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더니, 국회방송을 시작한 이래

최고의 시청률이 나오고 유투브 동영상까지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네티즌들은 MBC<마이 리틀 텔레비전>을 패러디해,

마이 국회 텔레비전, ‘마국텔이란 애칭까지 붙여줬다.

전혀 예상치 못한 시민들의 폭발적인 반응에, 야당 국회의원들이 당황하기까지.

필리버스터를 직접 보겠다고 국회방청석을 가득 메운 시민들과

이 생생한 역사적 현장을 내 아이에게 직접 보여주겠다며 함께 온 부모들까지.

한국사회에선 좀처럼 보기 드문 진풍경이 벌어졌다.

 

야당 의원들과 여러 전문가들은 테러방지법이 담고 있는 독소조항에 대해

지속적으로 거론해왔다. 만약 테러방지법이 그대로 통과된다면,

국정원이 영장없이 상시적으로 전 국민을 감시하는 게 가능할 수도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더구나 최근에 드러났듯이 국정원이 저지른 간첩조작사건,

댓글부대를 동원한 선거개입으로 신뢰가 깨진 상황에서라면.

무제한 토론에서 야당 의원들은, 지금까지 이 나라 언론들이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던, 국정원의 폐해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야말로 중앙정보부, 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으로 이어지는

국정원의 흑역사가 탈탈 털리는 순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껏 잘 몰랐던, 국정원의 실체에 대해 알게 된 계기가 됐다할까.

그래서 더 관심을 끌었는지도.

 

필리버스터 단상에 오른 한 야당의원이 손에 들고 소개한 책,

바로 이 소설<리틀 브라더>.

이 야당 국회의원은 국가안보를 위한다는 이유로

견제장치가 미흡하고 규정이 모호한 상태로 테러방지법이 통과된다면,

소설 속 이야기가 한국사회에서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며 이 법을 반대한다.

그러나 192시간 25분이란 대기록을 남기며 밤낮없이 진행한

필리버스터에도 불구하고 테러방지법은 통과됐다.

야당의원들이 전원 퇴장한 채 진행된, 다수당인 여당만의 표결로.

 

이제 국정원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언제든,

어떤 개인의 사생활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는 합법적 권한을 갖게 됐다.

테러용의자로 의심되는 사람의 휴대폰과 이메일, 계좌까지 볼 수 있다.

거기에 미행과 추적도.

이 의심스럽단 판단은 전적으로 국정원의 권한이다.

테러혐의에 대한 팩트가 아니라 의심스럽다는 국정원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누군가 테러용의자로 지목받아도 할 말 없게 됐다.

 

테러방지법이 통과된 뒤, 카톡을 탈퇴하고 독일에 서버를 둔 텔레그램으로

이동하는 사이버망명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테러방지법을 강력히 추진하고 찬성한 여당의원들까지 텔레그램에 가입하는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안에 취약한 국산휴대폰 대신 애플의 아이폰으로 갈아타고

구글 이메일 사용자도 증가한다는.

경제학자인 한 야당의원은 이번에 통과된 테러방지법으로

한국경제와 국내 IT기업에 타격을 끼칠 걸 우려한다.

 

이 책 말미에 보안전문가가 보탠 글.

사생활과 보안을 맞바꿔치기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사생활과 맞바꾸면서도 보안을 얻을 수 없다면, 그거야말로 진짜 멍청한 짓이다.”

 

소설 속 이야기가 현실이 되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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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이야기 - 좌파 아빠가 들려주는
앙리 베베르 지음, 임명주 옮김 / 에코리브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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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릴 때 본 동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다들 알거다.

임금님 귀를 본 뒤 입이 근질근질하다, 말하고 싶어서.

말하다 걸리면 뒤지게 맞을 수 있다, 그래서 고른 게 대나무 밭.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 ) )

 

홍길동처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사회에선 사람 미친다, 숨 막혀서.

우리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

말하면 안 되는 금기어가, 읽어선 안 되는 금서가 있었다.


영화 <변호인> 본 사람 많을 거다

불온서적이라 낙인찍힌 금지된 책을 읽었다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몰려 온갖 고문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변호를 맡은 송변이 그 책들의 내용이 뭔지 밤새워 읽는다

거기엔 <역사란 무엇인가>도 있다. 한때 이 책은 서울대 필독권장도서.

영화대로면 이 책 권장한 서울대 교수들은 빨갱이인거고 

서울대는 국립 빨갱이 양성소가 되는 셈이다.

 

좌파. 하면 공산당, 마르크스를 떠올리는 사람들 많을 거 같다.

우리나라면 빨갱이, 종북좌파, 북한을 생각할지도.

좌파라는 말에 편견을 갖는 이유 중엔 

공산주의를 표방한 옛 소련이나 현재 북한의 영향도 크다

얘들이 뻘짓을 참 많이 했다. 소련이나 북한 같은 나라는 짝퉁 공산주의다.

특히나 북한은 공산주의라 하기도 민망. 걍, 현대판 김씨왕조에 가깝다할까.

 

마르크스가 말한 진짜 공산주의는 아직 실현된 적이 없다

앞으로도 없을 거 같다.

<공산당선언>에서 마르크스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사회를 꿈꿨다

이론으론 가능하나 너무 이상적이다

현실에서 이럴 수 있는 사람은 바보거나 천사표

그렇다고 이 선언문의 주장들이 다 꿈같은 얘기고 과격한 생각은 아니다.

여기서 표방한 10대강령 중 7~8개는 이미 실현됐거나 부분적으로 도입중이니까

우리에게도 귀에 익은 무상급식, 보육, 교육, 의료, 공공주택 같은 

복지정책들이다. 유럽에선 이미 보편화돼가고 있는.

 

13, 15살 두 딸과 아빠가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으로 바캉스를 떠나고 있다.

운전 중인 아빠는 지루해할 딸들을 위해 

재미난 얘기를 해주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한다

하지만 프랑스 사회당출신 정치인의 숨길 수 없는 직업본능이 어김없이 작렬한다

딸들을 위해 택한 주제는 좌파이야기, 깬다.

 

이 깨는 아빠가 좌파우파라는 말의 유래부터 꺼낸다

설명을 위해 프랑스대혁명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 좌파가 보는 인간관과 가치관은 어떤 건지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우파와 어떻게 다른지 들려준다.

딸들은 제법 진지하게 아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질문도 던진다

그러다가 가끔 

아빠 그만해. 너무한 거 아냐.”는 투정으로 아빠를 삐지게 하고는 곧

의기소침해하는 아빠에게아빠 계속해봐.”하며 대화를 이어간다.

아빠와 두 딸이 토닥토닥 하는 모습이 재밌어 살짝 웃음짓게 한다.

 

좌파라는 말도 우리나라에선 한동안 금기어였다

뭐, 지금도 그닥 자유롭다 할 순 없지만

그래서 좌파대신 진보란 말을 더 자주 쓴다.

노동보다는 근로로 쓰고 인민’ ‘민중이란 말도 꺼린다.

서양에선 자연스럽게 쓰는 말인데도.

내가 어릴 적엔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 가자란 동요도 있었는데 

동무란 말도 친구로 바꿔 쓴다.

 

우리나라는 한국전쟁이라는 참혹한 불행을 겪었다

좌우 이념대립이 불러온 참극이다

아직도 우리에겐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와 레드콤플렉스가 남아있어 

은연중에 자기검열을 하는 심리가 작동한다이것도 불행한 일.

 

<동아시아 30년 전쟁>이란 강의를 보면 독립투사들도 서로 이념이 달랐다

그러나 좌우를 뛰어넘어 독립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한 동지.

해방후 독립투사들 중 좌파는 북으로 우파는 남으로 갈라진다.

어제의 동지가 이제는 적이 되어,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희생된 

우리 이 비극적 역사를 알아야한다며 격정적인 강의를 한다

참 인상적인 강연이었다이념이 대체 뭐길래..ㅠㅠ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했다

좌파든 우파든 이념이란 사람의 생각에 불과하다

이념이 사람보다 먼저일 순 없다.

이 책은 선입견이나 편견을 넘어 좌파라는 하나의 사상을 이해하게 해주는

안내서 같은 역할을 한다.

복지국가라는 유럽은 좌파사상의 장점도 적극적으로 국가정책에 반영해왔다.

다수 국민들이 더 만족해하고 행복해하는 제도를 고민하고 시행하는 게 

국가가 해야할 당연한 의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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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왜? - 1945 ~ 2015
김동춘 지음 / 사계절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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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이 신조어를 첨 들었을 때만해도일부 청년세대의 반감어린 비아냥쯤이 

아닐까했다. 근데 언론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더니, 이젠 정치권에서도 

이 말이 자주 나온다. 그렇다면 이건, 청년들만의 생각은 아니지 않을까.

 

지옥이란 뜻의 헬과 봉건왕조인 조선을 묶어놓은 말.

알다시피, 지옥이란 죄지은 사람이 죽어서 벌을 받는 곳이고 

조선은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청년들이 이 나라를 헬조선에 빗댄다는 건, 

지옥의 고통에다 신분차별까지 받고 있다는 뜻으로 읽었다.


어느 네티즌이 댓글에 지옥에 대한 모독이다고 썼다.

왜냐면, 지옥은 죄를 진 사람에게만 벌을 내리지만

지금 이 나라는 아무 죄없는 사람도, 단지 출신과 처지가 어떠냐에 따라 

벌을 받는 곳이기 때문이란다.

미래의 주역인 청년들이 거의 저주에 가까운 현실인식을 하고 있다는 건,

자신들뿐만 아니라 이 나라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왜 청년들이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걸까?

고생도 모르고 곱게 자라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불만이나 늘어놓는 

나약한 세대라서?

현실의 어려움을 견디며 도전하는 열정과 패기가 부족하다고 

몰아 부칠 일만은 아니다.

우리 땐 어쨌다는 식의 부모세대 잣대를 들이댄다면

청년세대와 인식차이만 확인할 뿐 어떤 접점을 찾긴 힘들 거라 생각한다.


3, 5, 7포세대도 모자라 n포세대란 자조 섞인 푸념이 나오더니

급기야 헬조선이라는 지독한 독설에까지 이르렀다.

이 사회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는 청년들의 절규다

이곳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면 희망을 찾아 떠나는 수밖에.

청년들 사이에 유럽복지국가로 떠나기 위해 이민계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다고 한다.

 

헬조선을 외치는 청년세대에게 집권여당은 역사교육을 잘못 받았기 

때문이라 말한다.

청년들의 부정적인 현실인식은 자학사관을 심어준 역사교육 탓이란다.

그래서 애국심을 드높일 수 있는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필요하다고.

정말 청년들이 역사교육을 잘못 받아서 이러는 걸까?

국가가 쓴 단 하나의 역사교과서로 교육하면 지금 이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되는 걸까?

 

역사논쟁으로 나라가 시끄러웠다. , 아직도 진행중이지만.

집필진이 철저히 가려진 채로, 이게 무슨 국가기밀이라도 되나보다.

조만간 고전문학시간에나 봤던 작자미상의 국사책을 보게 될지도. 


이 참에 근현대사 관련 책을 더 읽어봐야겠다고 맘먹고 있었는데

마침 이 책이 나왔다.

해방 후, 대한민국의 권력을 어떤 세력이 장악했고

과거 70년 동안 어떻게 국가를 이끌어왔는지

그들이 어떻게 지금의 주류세력이 되었는지 탐색한다

저자는 현재 대한민국 정치사회의 문제

특히 보통 국민들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어디서 왔으며 

어떤 역사적 배경, 국제정치적 맥락과 조건에서 비롯되었는지 

묻고 답한다고 썼다.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 배운 역사는 거의 일제강점기까지였다.

이 해방전 역사도 중요성에 비해 전체분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충분치 않았다.어이없게도 해방후 역사는 몇 페이지로 대충 끝난 역사였다.

고대부터 조선까지에 역사교육도 필요하지만,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더 밀접한 역사는 가까운 근현대사다.


근데 이상하리만치 이 나라 역사교육은 근현대사엔 인색했다

적어도 우리세대에겐 그랬다

학교 다닐 때 배운 근현대사만으론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

고교를 졸업하고서야 학교수업에선 제대로 배울 수 없었던 

해방전후사 관련 책들을 찾아서 읽었다

그때 비로소 왜 이 나라 주류세력들이 그토록 근현대사 교육에 인색했는지 

이해가 됐다. 지금 고교에선 근현대사 부분을 우리보단 좀 더 배운다고 

들었는데 이 마저도 대폭 줄어들 거라 한다.

 

대한민국은 왜 이럴까?’라는 의문을 품어본 사람이라면 

꼭 한번 읽어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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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 고독한 사람들의 사회학
노명우 지음 / 사월의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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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과 권태 사이에서

짝을 찾아 아이 낳고 가족을 이뤄 함께 사는 건

누구나 그래야 하는 자연스러운 일.

안 그럼, 비정상인 삶이라는 세상 이치에 따라

그렇게들 살아왔고

오늘도 짝을 찾고픈 청춘남녀들은 

기꺼이 여자1호와 남자1호가 된다.

 

싱글남으로 살아온 저자의 자기고백이자, 사회학자로서 바라본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

짚신도 짝이 있다.

근데 저자의 말마따나 이 말을 뒤집어보면

짝을 찾지 못한 사람은 짚신만도 못하단 뜻.

이 말대로면, 짝을 찾기 위한 노력은

짚신만도 못한 루저가 될 순 없다는

최소한의 자기방어라고 해야 함?

하지만 언제부턴가, 단단해만 보이던 세상의 이치라는 

이 기준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제 우린, 짚신조차도 로맨스가 없다면

짝을 찾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느 영화제목처럼,

누구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또 누군가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거처럼,

혼자 사는 사람은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안정된 삶을 사는 게 좋아 보이고

함께 사는 사람은

가족의 울타리 밖에서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게 좋아 보이고.

서로에게서 내가 갖지 못한 행복을 찾고 있다.


혼자 산다는 것과 함께 산다는 것

저자는 자신처럼 혼자 사는 사람들 대개가

독신주의라는 무슨 거창한 철학이나 소신이 있어서

혼자 사는 게 아니라고.

그냥 어쩌다보니혼자 살게 된 것일 뿐.

<신사의 품격>이나 <섹스 앤 더 시티>처럼 미디어가 보여주는

화려한 싱글에 대한 판타지란,

현실로 넘어오면 지극히 소수에게만 허락된 라이프스타일.

 

혼자 사는 삶이란

문득 외롭고 가끔 서글퍼지고 때론 두렵기까지.

1인용 식탁에 올릴 재료비는 당연히 직접 벌어야하고

손수 요리하고 차리고 뒤처리까지 해야 하는.

몸살 났을 때 콩나물국이라도 식탁에 올려주는

우렁각시란 전설에나 나올 뿐인 망상.

4인용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밥 먹는 사람들처럼

누군가 벌어오면 누군 요리하고 나머진 차리고 치워주는

역할분담이란 애초에 기대할 수 없다는.

이 또한 행복한 결혼이란 판타지일지도.

 

혼자 살기 위해 터득해야할 내공이라고나 할까.

남 눈치 안보고 혼자 식당에서 밥 먹고

떳떳하게 혼자 극장에서 영화도 볼 수 있어야하며

혼자 커피숍에서 청승맞지 않게 커피한잔 마셔주기도 하고

홀가분하게 혼자 여행다니면서도 궁상맞아 보이지 않아야하는.

고기집 주인의 곱지 않은 시선정도는 가뿐히 쌩까주시고

혼자 태연하게 삼겹살 구워먹을 뻔뻔함까지 갖췄다면

싱글로 살기에는 최적의 자질을 겸비한 셈.

혼자 산다는 건

이 모든 거에 익숙해져야 하는 삶. 하지만, 글쎄......

 

함께 사는 삶이란

문득 서운하고 가끔 답답해지고 때론 허무하기까지.

기념일을 까먹지 않고 챙기는 기억력과 세심함이 있어야하고

아이에겐 재밌는 아빠, 상냥한 엄마여야 하며

처가엔 듬직한 사위, 시댁엔 살가운 며느리까지

1인 다역의 역할을 무난히 소화해내는 연기력도 갖춰야한다는.

시도 때도 없이 다른 가족과 비교당해도 쿨한 척 넘길 수 있어야하고

이제 아이들마저 품에서 떠난 새처럼 멀게만 느껴지면

남편은 돈 버는 기계로 산 거같고 아내는 가사도우미로 산 거같은.

난 뭔가, 난 누군가란 질문이 불현듯 찾아들면 사춘기때완 비교불가.

함께 산다는 건

이 모든 거에 의연해져야 하는 삶. 하지만, 과연......

 

어떻게 살 건지

어쩌다보니 혼자 살게 된 삶.

함께 살다가도 이혼하고 사별해서 혼자가 되기도 하는.

결혼과 가족도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 되가는 시대.

수명이 길어져 젊음은 잠깐이고 노년은 길어진 시대.

혼자 사는 게 비정상인 삶에서 1인가구로 사는 걸

정상이라 받아들여야 하는 미래가 성큼 다가온 세상에서

우린 어떻게 살아야할까.

 

외롭고 힘들어 든든한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울 때

혼자 사는 사람에겐

사회를 가족삼아 또 다른 1인가구와 연대가,

무거운 역할밀도로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고 싶을 때

함께 사는 사람에겐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갖는 노력이,

 

저자는 단독인으로서 사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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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바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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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내 기억 속 칼뱅은 개혁가라는 긍정적 이미지였다.

그런데 츠바이크는 칼뱅을 독재자로 묘사한다. 비열하고 무자비한.

이 독재자에 홀로 맞선 인문주의자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

이 무모한 싸움을 시작한 카스텔리오는 자신을 

코끼리 앞의 모기라 표현했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먼저,

이거 개신교에겐 아주 불편한 얘길 수 있겠는걸이란 생각이.

예전에 소설<다빈치 코드>가 나오고 영화로 만들자,

기독교에서 상영금지 가처분소송까지 냈던 거처럼.

아니나 다를까, 츠바이크도 책을 쓰면서 이런 오해나 반발에 

신경이 쓰였던 모양.

츠바이크가 그리고 있는, 독재자 칼뱅의 모습이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지,

첨 듣는 얘기라 나로선 알 수 없다.

하지만, 무교인 나에게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내 관심을 끄는 건 인간으로서 갖는 기본권리.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를 위해,

목숨 걸고 홀로 외롭게 맞서는 한 인간과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자의 폭력.

설사 이 책이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한 게 아니라 소설이라고 해도,

츠바이크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의 본질은 여전히 유효하니까.

 

가톨릭의 성서해석과 다른 의견이란, 용납할 수 없는 불경죄였다.

자칫 이단으로 몰려, 화형까지 당할 수 있는 엄혹하고 암울한 시대.

중세암흑기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엔, 사탄이나 마녀사냥 얘기가 자주 나온다.

종교적 권위를 지키고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애꿎은 사람과 여자들을 악마의 사탄이나 마녀로 몰아 제물로 삼는,

끔찍한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공포를 먹고 사는 권력이랄까.

 

가톨릭의 독단에 맞서 종교개혁을 추진했던 칼뱅.

그러던 그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난 뒤, 자신이 그토록 비판했던

가톨릭보다 더한 지독스런 독재자의 모습으로 돌변한다.

자신의 성서해석과 다른 의견을 가졌다는 이유로

세르베투스라는 한 인간을 이단으로 몰아 제거하기 위해,

증거를 조작하는 비열한 짓도 서슴없이 저지른다.

자신의 권위에 흠집을 낸, 이 괘씸한 자를 향해 편집광적인 복수심에 

불타올라온갖 핍박과 고문으로도 모자란 듯

마침내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이는 만행까지.

이제 칼뱅이 지배하는 나라의 시민들은 자유를 잃어버리고

공포에 떨며 침묵한 채 살아가는, 죽은 시민의 사회가 된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 모든 독재자에겐 같은 정신적 유전자가 흐른다.

바로 억압과 폭력의 DNA.

자신에게 반대하는 생각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다른 의견을 가진 자가 쓴 책을 불태우고, 말하는 것도 글 쓰는 것도 

금지한다.하지만 반대자를 침묵하게 만드는 걸로도 만족스럽지 않다.

그가 살아, 같은 하늘아래 존재하고 있단 사실 자체도 받아들일 수 없는.

끝내 목숨까지도 빼앗아 영원히 침묵하게끔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듯이.

 

권위란 스스로 자신에게 부여하는 게 아니다.

진정한 권위는 남들이 인정해줄 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

억압과 폭력으로 복종을 강요해 유지하는 셀프권위란,

아무리 내 것이라 자기최면을 걸어 착각에 빠져 살려고 해도,

언제든 무너져 내려 사라질, 불안하고 위태로운 허상과도 같은 것.

독재자들도 자신의 권위가 정당성이 없다는 걸 잘 안다.

억압과 폭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는 게 그 반증이라 할까.

그런다고 초조함과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고.

마침내 자신의 치부가 역사에 남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은폐와 조작도 서슴지 않는다.

 

한 사람을 영원히 침묵하게 하고

여러 사람을 오래 침묵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모든 사람을 영원히 침묵하게 할 순 없다.

내리누르려는 억압의 힘이 크면 클수록,

튀어오르려는 반동의 힘도 커지는 법.

 

죄없는 한 인간이 화형대의 한줌 재로 사라져가는 걸 보면서도

독재자의 억압과 폭력이 두려워 모두가 침묵할 때,

타인의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를 위해 변론에 나서는 카스텔리오.

자신에게도 닥칠지 모를 비열한 음모과 폭력의 위험 앞에

침착함과 온화함을 잃지 않은 채, 이성과 논리로 말과 글로.

말과 글밖엔 독재자에 맞설 수단이 없는 이 외로운 저항은 좌절되고

독재자 칼뱅은 역사의 승리자로 남는 듯했다.

그러나 영원히 묻힐 것 같았던 카스텔리오는 다시 살아나

역사의 진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모든 칼뱅에 맞서는 어떤 카스텔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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