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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브라더
코리 닥터로우 지음, 최세진 옮김 / 아작 / 2015년 10월
평점 :
어느 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테러가 일어난다.
공습경보 사이렌과 함께 ‘대피소로 이동하라’는 방송이 흘러나오고
마커스와 친구들은 혼비백산이 된 수많은 군중들 틈에 끼여 대피하다
친구 한명이 부상을 당해 피를 흘린다.
도움을 청하러 길가로 나간 이 고교생들은, 순식간에
검은 두건이 씌워지고 손발이 묶인 채, 어디론가 끌려간다.
이들을 기다리는 건 감금과 고문.
이들이 졸지에 테러용의자가 된 이유는, 땡땡이 치고 학교를 빠져나온 거.
땡땡이 친 대가치곤 너무 가혹하다.
제목 ‘리틀 브라더’를 보고 조지오웰의 소설<1984>에 ‘빅 브라더’를 떠올릴지도.
오웰의 소설이 1940년대에 상상한 공산주의 국가에 도래할 감시사회였다면,
이 소설은 그리 멀지않은 미래에 등장할 자본주의 국가의 감시사회를 그리고 있다.
빅 브라더 vs 리틀 브라더 라고나 할까.
911사태 이후, 미국사회는 테러방지란 명분으로
전 국민 감시체계를 강화했다. 일명 애국법.
소설에서도 효율적인 대테러활동을 위해 국토안보부에 막강한 권한을 부여한다.
학생들에게 제공한 노트북 ‘스쿨북’은 학생들이 입력하는 모든 단어를 검열하고
의심스런 검색이라 판단하면 국가기관이 추적한다.
학교 복도와 길거리에 수많은 CCTV를 설치하고, 마치 지문으로 신원파악을 하듯
걸음걸이 패턴으로 누군지 판별하는 인식장치가 달려있다.
폭발로 다리가 무너지는 테러가 발생하자 시민들은,
테러방지를 위해서라면 시민의 기본인권마저 국가에 헌납해야 한다는,
권력의 위압에 기꺼이 굴복한다.
스마트폰, 신용카드, 교통카드, 네비게이션...개인사생활이 담긴 모든 것이
감시도구가 된다. 어딜 가는지, 뭘 사는지 모든 정보를 국토안보부가 들여다본다.
국토안보부는 미국 헌법위에 군림하는 듯 초법적 권력으로 격상된다.
애국자임을 인증받기 위해선 사생활과 인권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한가.
자칫하면 사소한 실수로도 테러용의자로 의심받고 끌려갈 수도 있는데.
국가반역자로 몰리지 않기 위해, 시민들은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며
잔뜩 움츠린 채 일상을 살아간다.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가 쓴 <감시와 처벌>에서
‘판옵티콘’이라는 원형감옥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덤이 18세기에 고안한 감시시설이다.
판옵티콘(panopticon)이란 ‘다 본다’ 는 뜻.
‘나는 니가 무슨 짓을 하는지 다 보고 있다’고 겁박한다고나 할까.
이 원형감옥은
바깥쪽에 원을 따라 죄수를 가두는 방이 둘러서 있고,
중앙엔 죄수를 감시하는 원형탑이 있다.
감방은 언제나 밝게 유지되고 감시탑은 늘 어둡도록 설계돼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항상 나를 감시할 수 있는 상황.
나는 감시자가 누군지 알지도 볼 수도 없지만,
감시자는 내 일거수일투족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두려움.
이제 죄수는, 감시탑에서 간수가 잠을 자거나 설령 자릴 비우더라도
어둠 속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을지 모르는 고양이 앞에, 얌전한 쥐가 된다.
스스로 감시하는 ‘규율의 내면화’가 이뤄지는 것.
판옵티콘이 보여주는 감시의 원리가 사회전반으로 스며든 세상.
18세기 원형감옥의 작동방식은 21세기에 전자감시 형태로 진화돼,
온 사회전체를 ‘슈퍼판옵티콘’이라는 거대한 감옥으로 변모시킬지도 모를
가능성의 길을 열어놓고 있다.
푸코는 비록 다수가 동의한 제도라도 오류의 가능성이 있으며,
이 제도가 구축한 질서에 무조건 복종을 강요하는 절대권력으로
군림할 수 있음을 일깨운다.
올해 초,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진행한 ‘필리버스터’가 굉장한 관심을 끌었다.
책이나 해외 뉴스에서 봤던 필리버스터를 우리 국회에서 보게 될 줄이야.
‘테러방지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이 무제한 토론이 열리는 동안,
연일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더니, 국회방송을 시작한 이래
최고의 시청률이 나오고 유투브 동영상까지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네티즌들은 MBC<마이 리틀 텔레비전>을 패러디해,
마이 국회 텔레비전, ‘마국텔’이란 애칭까지 붙여줬다.
전혀 예상치 못한 시민들의 폭발적인 반응에, 야당 국회의원들이 당황하기까지.
필리버스터를 직접 보겠다고 국회방청석을 가득 메운 시민들과
이 생생한 역사적 현장을 내 아이에게 직접 보여주겠다며 함께 온 부모들까지.
한국사회에선 좀처럼 보기 드문 진풍경이 벌어졌다.
야당 의원들과 여러 전문가들은 테러방지법이 담고 있는 독소조항에 대해
지속적으로 거론해왔다. 만약 테러방지법이 그대로 통과된다면,
국정원이 영장없이 상시적으로 전 국민을 감시하는 게 가능할 수도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더구나 최근에 드러났듯이 국정원이 저지른 간첩조작사건,
댓글부대를 동원한 선거개입으로 신뢰가 깨진 상황에서라면.
무제한 토론에서 야당 의원들은, 지금까지 이 나라 언론들이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던, 국정원의 폐해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야말로 중앙정보부, 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으로 이어지는
국정원의 ‘흑역사’가 탈탈 털리는 순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껏 잘 몰랐던, 국정원의 실체에 대해 알게 된 계기가 됐다할까.
그래서 더 관심을 끌었는지도.
필리버스터 단상에 오른 한 야당의원이 손에 들고 소개한 책,
바로 이 소설<리틀 브라더>.
이 야당 국회의원은 국가안보를 위한다는 이유로
견제장치가 미흡하고 규정이 모호한 상태로 테러방지법이 통과된다면,
소설 속 이야기가 한국사회에서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며 이 법을 반대한다.
그러나 192시간 25분이란 대기록을 남기며 밤낮없이 진행한
필리버스터에도 불구하고 테러방지법은 통과됐다.
야당의원들이 전원 퇴장한 채 진행된, 다수당인 여당만의 표결로.
이제 국정원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언제든,
어떤 개인의 사생활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는 합법적 권한을 갖게 됐다.
테러용의자로 의심되는 사람의 휴대폰과 이메일, 계좌까지 볼 수 있다.
거기에 미행과 추적도.
이 의심스럽단 판단은 전적으로 국정원의 권한이다.
테러혐의에 대한 팩트가 아니라 ‘의심스럽다’ 는 국정원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누군가 테러용의자로 지목받아도 할 말 없게 됐다.
테러방지법이 통과된 뒤, 카톡을 탈퇴하고 독일에 서버를 둔 텔레그램으로
이동하는 ‘사이버망명’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테러방지법을 강력히 추진하고 찬성한 여당의원들까지 텔레그램에 가입하는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안에 취약한 국산휴대폰 대신 애플의 아이폰으로 갈아타고
구글 이메일 사용자도 증가한다는.
경제학자인 한 야당의원은 이번에 통과된 테러방지법으로
한국경제와 국내 IT기업에 타격을 끼칠 걸 우려한다.
이 책 말미에 보안전문가가 보탠 글.
“사생활과 보안을 맞바꿔치기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사생활과 맞바꾸면서도 보안을 얻을 수 없다면, 그거야말로 진짜 멍청한 짓이다.”
소설 속 이야기가 현실이 되지 않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