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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초 티처의 111 라틴어 필사집 - 10대의 빛나는 순간을 써 내려가다.
산초 티처 조경호 지음 / Orbita(오르비타) / 2025년 12월
평점 :
[이 리뷰는 리뷰의숲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나라 외대부고에서 라틴어를 가르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솔직히 놀라움이 먼저였다. 라틴어는 늘 아주 먼 과거의 언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던 라틴어란 그저 모든 서양 언어의 뿌리라는 설명 정도였고, 실제 삶과는 크게 닿아 있지 않은 학문적 언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그 인식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언어는 사라지지 않고 형태를 바꿔가며 살아남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미 수많은 라틴어 문장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라>,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 같은 문장들은 정확한 원문을 알지 못해도 귀에 익숙하다. 누군가의 좌우명으로, 인생 조언으로, 혹은 힘든 시기를 버티게 해주는 말로 우리는 이런 문장들을 자연스럽게 인용하며 살아간다. 그 뿌리가 라틴어라는 사실은 언어가 시간을 건너 살아남는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오래된 문장이 여전히 지금의 삶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 깊다.

이 책에 실린 모든 문장이 지금의 나에게 완벽하게 와닿는 것은 아니다. 어떤 문장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지만, 어떤 문장은 아직은 내 삶과 거리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거리감마저도 이 책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지금은 이해하지 못해도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읽게 될 문장들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마치 아직 열리지 않은 서랍처럼, 시간이 지나야 의미가 드러날 문장들이 책 속에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읽는 속도가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한 문장을 읽고 잠시 멈추게 되고, 다음 장으로 쉽게 넘어가지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밑줄만 긋고 지나쳤을 문장 앞에서, 나는 자꾸만 생각을 덧붙이고 싶어졌다. 문장이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질문에 답하지 않으면 다음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이번 필사책에서는 처음으로 문장 옆에 내 생각을 주저리주저리 적기 시작했다. 책장을 끝까지 펼치는 것조차 조심스러하던 성격인데, 이 책에는 자연스럽게 낙서를 하게 되었다. 지금의 나에게 유독 와닿는 문장 앞에서 가만히 멈춰 서서, 마치 책에게 하소연하듯 마음을 적어 내려갔다. 때로는 공감의 말이었고, 때로는 반박이었으며, 어떤 날은 그저 지금의 상태를 기록한 메모에 가까웠다.

그 과정에서 책은 더 이상 읽는 대상이 아니라 대화를 나누는 존재가 되었다. 오래된 라틴어 문장이 현재의 나를 불러내고, 나는 그 문장에 지금의 언어로 답을 건넸다. 필사란 글씨를 따라 쓰는 행위라기보다, 생각을 붙잡아 두는 행위라는 걸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실감했다.
필사책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문장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과 함께 머무는 시간. 라틴어라는 오래된 언어가 오히려 지금의 나를 가장 솔직하게 비추고 있다는 점이 인상 깊다. 이 책은 과거의 문장을 통해 현재의 나를 들여다보게 만든다. 조용하지만 오래 남고, 다시 펼칠 이유가 분명한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