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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라서 더 끌리는, 아르헨티나 - 지구 반대편 하늘 아래 머무른 3년의 기록
백상아 지음 / 미다스북스 / 2025년 5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서적을 제공받아 재미있게 읽은 솔직 후기입니다.>
남미, 아르헨티나. 한반도 반대편 끝에 있어 시간차도 계절도 모두 반대인 나라. 나에게 아르헨티나는 축구 잘하는 나라, 메시의 나라, 그리고 언젠가 기사에서 봤던 200%가 넘는 초인플레이션의 나라 정도였다. 그 이름은 익숙하지만 실체는 흐릿하고 멀게 느껴졌던 나라. 그런 아르헨티나가 이 책을 통해 조금 더 또렷해졌고, 단지 ‘머나먼 이국’이 아니라 우리가 지나온 시간과 맞닿아 있는 거울 같은 나라로 느껴졌다.

이 책은 한 30대 여성이 3년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파견교사로 머물며 직접 경험하고 관찰한 아르헨티나의 일상과 정치, 역사, 사람, 음식, 문화에 대한 기록이다. 흔히 말하는 여행 에세이처럼 반짝이고 낭만적인 이미지들만을 나열하지 않는다. 이 책은 오히려 그 반대편에서 아르헨티나를 바라본다. 멀리 있는 이국의 풍경이라도 진창에 발을 빠뜨리고, 습기 찬 벽지 냄새를 맡으며, 소매치기를 걱정하며 살아내는 현장의 냄새가 묻어난다. 그렇기에 책장을 덮고 나면 관광이 아닌 ‘삶으로서의 여행’을 한 기분이 된다.
아르헨티나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역사를 품고 있다. 식민지배와 전쟁, 군부독재, 민주화 투쟁이라는 굵직한 역사적 굴곡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와 닮아 있다. 하지만 지금, 두 나라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아르헨티나는 여전히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위기에 시달리고 있으며, 복잡하고 불합리한 세법은 젊은 세대에게 희망을 앗아가고 있다. 책에서는 “세금이 폭탄처럼 돌아온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일상에 깊게 파고드는 공포로 느껴진다. 급기야 많은 젊은이들이 나라를 떠나거나 해외에 계좌를 개설하며 다른 삶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이민자들은 자신의 삶을 개척해왔다. 저자가 만난 재외한인 1.5세대, 2세대들은 치열하게 공부하고 노력해 지금은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이질적인 환경 속에서 적응하고, 현지 사회에 녹아들며 이민자의 정체성을 단단히 다져왔다. 그들이 뿌리내린 이야기는 짧은 책 속 한 챕터일 뿐이지만, 그 뒤에는 무수한 고통과 끈질긴 생존의 역사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며 나 역시, 이방인의 마음으로 어떤 도시의 아파트를 계약하려 하고, 치안 걱정을 하며 길을 걸어가는 장면들을 상상하게 된다.

책은 아르헨티나의 대자연과 풍경, 그리고 문화도 놓치지 않는다. 이과수 폭포의 장쾌함, 고산지대의 청명함, 그리고 정열적인 탱고와 와인, 전통 요리와 마테차까지. 이국의 낯선 언어와 음식, 문화가 책 속에서는 놀랍게도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루이스 보르헤스 같은 문인은 이제 익숙한 이름이 되었고, 마테차는 이미 우리 생활에도 스며든 음료다. 탱고는 TV 광고나 공연을 통해 이미 귀에 익은 리듬이다. 그러고 보면, 지리적 거리는 먼데 정신적 거리는 의외로 가까운 나라였다.
이 책은 단순한 ‘여행책’이라기보다는 ‘삶에 대한 책’이다. 멀고 낯선 나라에서의 생존, 관계 맺기, 관찰, 적응과 같은 일상의 감각들이 생생하게 녹아 있다. 예를 들어 집을 구하려다가 차별을 겪은 이야기, 외국인으로서 느끼는 소외감, 그리고 마트의 물가에 놀라는 순간까지. 그런 소소하지만 생생한 장면들이 오히려 이 나라의 본질을 더 잘 보여준다.
나는 이 책을 덮으며 마음 한구석에서 ‘언젠가는’이라는 말을 꺼내본다. 언젠가는 그 이과수 폭포 앞에 서보고 싶고, 언젠가는 파타고니아의 빙하 위를 걷고 싶다. 언젠가는 소보다 사람이 적다는 그 땅에서 소고기를 마음껏 먹어보고 싶다. 아르헨티나는 여전히 머나먼 나라지만, 이 책을 통해 그 먼 나라와 나 사이에 작지만 단단한 다리가 생긴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