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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삼킨 세계사 - 12척 난파선에서 발견한 3500년 세계사 대항해
데이비드 기빈스 지음, 이승훈 옮김 / 다산초당 / 2025년 7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재미있게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문명의 역사는 대개 땅 위에서 시작된다. 도시가 세워지고, 길이 뚫리고, 제국이 확장되는 서사는 지도를 따라 펼쳐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모든 역사가 육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바다는 언제나 인간의 도전이자 통로였고, 교역과 전쟁, 이주의 현장이었다. 문제는 그 대부분이 바다에 잠겨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 무너져 내려 잊혀졌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들이, 어느 날 난파선 하나가 건져 올린 청동 조각 하나, 깨진 항아리 하나를 통해 되살아날 수 있다는 걸 이 책은 증명해 보인다. 데이비드 기빈스의 "바다가 삼킨 세계사"는 그렇게, 바다 속에서 역사의 실마리를 건져 올리는 책이다.
책장을 펼치면, 먼저 저자 자신이 누구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는 단순한 학자가 아니다. 데이비드 기빈스는 세계적인 수중고고학자이며 동시에 수많은 대중 역사서와 소설을 써낸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책은 단지 유물에 대한 고증만으로 이루어진 과학적 보고서가 아니다.
각 난파선에는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목소리와 감정이 입혀져 있고, 침묵하던 바다에 이야기를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을 따라 읽는다는 건 단순히 선박의 구조나 해류의 방향을 공부하는 일이 아니라, 파도에 삼켜졌던 세계의 풍경을 천천히 복원해나가는 일이다.
책에는 총 12척의 난파선이 등장한다. 그 범위는 놀랍도록 넓다. 선사시대 도버 해협을 건넌 배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을 피해 은괴를 수송하던 영국의 군함에 이르기까지, 거의 3,500년에 걸친 해양사가 집약되어 있다.

이 책은 그 난파선들을 단순히 시대순으로 나열하지 않는다. 각각의 배에는 그 시대를 통과한 사람들이 살았고, 물건이 오갔으며, 정치와 권력이 얽혔다. 난파선은 그 시대의 단면을 정지된 채로 보여주는 하나의 프레임이다. 파편처럼 남겨진 유물들은 당대의 기술 수준이나 경제 시스템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울루부룬 난파선이다. 기원전 14세기, 지금의 터키 인근 해역에서 발견된 이 배는 당시 동지중해 전역에서 수집된 수많은 유물들을 실은 채 침몰했다. 코끼리 어금니, 구리괴, 주석, 이집트풍 장신구, 미케네 양식의 도자기까지. 마치 고대의 글로벌 쇼핑리스트라도 펼쳐 놓은 듯 다양한 문명의 조각들이 한 배에 실려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유물 컬렉션이 아니다. 이 배가 어떤 항로를 따라 어디서 출발했고, 무엇을 왜 실었는지를 추적해 나가다 보면, 바다를 통해 얽히고설킨 고대 지중해 문명의 네트워크가 그려진다. 교과서 한 페이지로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 역사의 입체성이 바닷속에서 드러난다.
흥미로운 건, 저자가 각 선박의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등장인물들의 구체적인 삶을 함께 상상한다는 점이다. 기원전의 궁수, 헬레니즘 시대의 상인, 로마 시대의 노예, 제국주의 시대의 선장까지. 이들은 모두 실존 인물은 아니지만, 발굴된 유물과 사료를 바탕으로 충분히 상상 가능한 사람들이며, 그들을 통해 이야기는 단단해진다.
고고학적 사실과 인간적인 상상력이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보완하며 몰입감을 준다. 수중고고학이라는 장르는 때때로 너무 기술적이거나 전문적일 수 있지만, 기빈스는 정반대로 간다. 우리는 바닷속의 산소통을 단 채, 저자와 함께 선체로 내려가고, 해저의 빛과 조류를 온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바다가 삼킨 세계사"는 제목처럼 과감한 선언을 담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사’라는 개념은 육지 중심, 제국 중심의 이야기일 때가 많다. 이 책은 그 시선을 전복한다. 바다는 분명히 인류사의 주변부가 아니며, 해양은 역사의 숨겨진 중심이라는 것이다.
바다는 소통의 통로였고, 충돌의 현장이었고, 문명의 흐름이 가장 먼저 감지되는 공간이었다. 난파선 하나가 발견되면, 우리는 단순히 잃어버린 배를 찾는 게 아니라, 잊고 있던 질문을 되찾는다. 왜 이 배가 여기에 침몰했는가, 이 항로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누가 이 배를 만들었고, 누가 그 안에서 죽었는가.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고고학 서사가 아니다. 정밀하고 웅장한 ‘바다의 역사서’이자, 동시에 바다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육지에서의 삶이 실패로 끝났을 때 바다로 눈을 돌렸던 사람들, 이민자와 모험가, 제국과 피식민자, 생존자와 침몰자들이 남긴 흔적은 때로 파편으로만 존재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진실한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책을 덮고 나니, 내가 바다를 얼마나 단순하게 보아왔는지 알게 됐다. 파랗고 광활한 풍경 뒤에는 수천 년간 누군가가 지녔던 두려움과 용기, 갈망과 상실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데이비드 기빈스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건져 올려, 독자 앞에 펼쳐 놓는다. 마치 고대의 수면 위에 다시금 돛을 올리는 것처럼, 그가 불러낸 바다의 이야기들은 그렇게 새로운 세계사로 항해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