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가 된 날
무라나카 리에 지음, 시라토 아키코 그림, 현계영 옮김 / 인북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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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재미있게 읽고 정리한 글입니다.>

토끼는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고, 낯선 기척에는 몸을 말아버린다. 어쩐지 사람들은 그런 토끼를 '겁 많고 나약한 존재'로 인식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점이 토끼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만의 속도로, 조용히, 그러나 느리게 무언가를 지켜보는 동물.




《토끼가 된 날》을 펼치게 된 것도 그런 조용한 끌림 때문이었다. 사실 시작은 단순했다. 표지에 그려진 초콜렛 색깔의 토끼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별빛 아래서 기도하고 있는 것 같은 이 토끼는,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내 마음 한켠을 가만히 지키고 있었다.

책은 총 네 편의 짧은 이야기와 그 앞을 여는 짤막한 시로 구성돼 있다. 시가 먼저 독자의 마음을 느슨하게 풀어준 뒤, 마치 조용한 숨처럼 본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야기들은 ‘리코’, ‘나나’, ‘아즈미’, ‘타쿠토’라는 이름의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네 명의 아이들은 공통적으로 '조금 느리고, 여리고, 망설이는 마음을 가진 존재들'이다. 말을 꺼내는 일이 쉽지 않고, 앞에 나서는 일은 더욱 어렵고, 때론 감정을 숨기느라 혼자 토끼처럼 조용히 몸을 말기도 한다.

첫 번째 이야기인 ‘토끼가 된 날’은 발표회가 두려운 리코가 선생님에게 ‘이야기 노트’를 선물받으며 시작된다. 그 노트 안에는 귀여운 토끼가 그려져 있고, 그 토끼는 마치 리코처럼 작고 말수가 없지만, 대신 그녀의 마음을 표현해주는 역할을 한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한마디, “잘하고 있어”라는 말이, 리코에게는 단단한 응원이 되어 다가간다. 이 책의 핵심 메시지가 가장 명확히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두 번째 이야기 ‘엄마 토끼’는 무대 공포증이 있는 나나의 이야기다. 학예발표회 갑작스레 ‘엄마 토끼’ 역할을 맡게 된 아이. 짧은 대사를 위해 수없이 연습하는 모습은 아이들의 진심과 긴장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런 그녀를 책방하고 놀리기보다 손 내밀어주는 친구 고우키로 인해 나나는 용기를 내고 한발 내딛게된다.




세 번째 이야기 ‘슬로우 댄스’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그리워하며 지내는 할아버지와, 그런 할머니를 함께 추억하느누손녀의 이야기다. 기분이 좋은날 아침이면 할아버지를 마당으로 불러내 천천히 면도를 해주는 할머니의 모습은 삽화에 있지 않아도 눈 앞에 조용하고 잔잔하게 그려진다.




마지막 이야기 ‘자전거를 타고’는 선생님이 전근을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타쿠토의 심리를 다룬다. 그리고 이런 타쿠토를 위해 시간을 두고 기다려주는 어른들. 어른은 아이를 위로하고 아이는 점차 어른이 되어간다.




이 책의 특별함은 바로 그림에 있다. 시라토 아키코의 토끼 그림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섬세하다. 특히 리코의 노트에 그려진 토끼, 그리고 표지의 토끼는 단순한 삽화가 아니라, 책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으로 작용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각자 다른 얼굴과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은 모두 ‘토끼가 된 아이들’이다. 누군가의 시선이 불편하고, 말이 나오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많은 것을 감당하는 아이들.

《토끼가 된 날》은 말하지 않고도 말하는 이야기다. 누군가가 해주길 바랐던 말, 기다렸던 손짓,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빌려 용기를 내보는 마음. 그것들이 이 얇은 책 안에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담겨 있다.
어른이 되어 잊고 지낸 마음들이 있다. 남들보다 느린 것이 부끄러웠고, 쉽게 상처받는 것이 약하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이 책은 말한다. 그 느림과 여림은 ‘존재의 모양’일 뿐이며, 그것 또한 ‘힘’이 될 수 있다고.


책을 덮고 나니, 내가 한때 얼마나 많은 토끼의 마음으로 세상을 견뎠는지 떠올랐다. 이 책은 아이를 위한 책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어른을 위한 토끼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조용하고 다정하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괜찮아, 잘하고 있어." 그렇게 말 걸어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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