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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에 묻히다 - 독립영웅, 혹은 전범이 된 조선인들 이야기
우쓰미 아이코.무라이 요시노리 지음, 김종익 옮김 / 역사비평사 / 2012년 7월
평점 :
정부의 한일군사협정 추진 파문에 이어서 독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한일관계가 갈등을 빚고 있다. 한일관계의 냉각은 두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며, 일본 내부의 우경화 경향 속에서 센카쿠 열도 문제 등 주변 동아시아 국가와의 갈등이 개재되어 있다. 여기엔 또한 각 지역의 역사인식 문제도 결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얼마 전 역사비평사에서 출간된 <적도에 묻히다>(우쓰미 아이코·무라이 요시노리 지음, 김종익 옮김)가 전해주는 메시지는 적지 않아 보인다.
1942년 6월, 3천여 명의 조선인 군무원들이 모집되었다. 때는 일제가 조선을 전쟁수행의 병참기지로 만들어 조선인들을 억압하고, 한편으론 적극적으로 동원해갔던 시기였다. 모집된 조선인들은 10대 후반에서 20대의 남성 청년들로서 일제하의 가난, 탄압, 황민화 교육이라는 구조 속에서 당시로서는 고소득의 월급을 준다는 사실에 전쟁터로 가게 되었다. 이들은 군무원이었지만 사실상의 군인 훈련을 받고, 최전선인 동남아시아 일대로 배치 받았다. 그들은 각지의 포로수용소와 연합국의 민간인을 억류한 억류소에서 일본군 장교·하사관의 지시를 받으며 근무하였다.
반강제적인 상황에서 전장으로 오게 된 군무원들은 한편으로는 일제의 전쟁수행의 협력자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 군무원들 속에서도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꿈틀대고 있었다. 책에서의 주된 공간인 인도네시아에서는 일본의 패망이 현실화하고 있었던 1944년 12월 29일, 연합군의 상륙시 일본군을 후방에서 교란하거나 전투를 벌일 목적으로 고려독립청년당이 결성되었다. ‘아시아의 강도, 제국주의 일본에 항거하는 폭탄아가’ 되고, ‘세계 여러 나라에 우리의 진의를 소통’하고 유대하면서 민족을 위하여 행동할 것을 결의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청년당의 활동은 암바라와에서의 항일 반란(3부)을 제외하면 별 활동을 하지 못한 채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에겐 곧 해방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본의 패전으로 해방을 맞았고, 조선인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인도네시아에선 군무원들과 민간인들이 모여 조선인민회를 조직해 귀국 준비를 하였다. 1946년 4월부터 귀향이 시작되었는데, 막상 군무원들은 따로 분류되어 귀향하지 못했다. 이들은 일제의 전쟁수행에 가담한 혐의로 전범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그들이 근무했던 포로수용소와 억류소는 헌병대 및 형무소와 함께 ‘조직적 테러 단체’로 간주되어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재판 결과 140명의 조선인이 전범자가 되었고, 그 가운데 23명이 사형 판결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한편으로 조선인 중에는 전후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사이에 벌어졌던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참가한 사람도 있었다. 독립전쟁에 참가한 옛 일본군 병사는 대략 600여 명인데, 그 가운데 조선인들도 참가하고 있었다. 그들이 전쟁에 참가한 동기는 여러 가지겠지만, 저자는 그들의 희생을 조선인과 일본이라는 민족의 벽을 넘어서 인류애라는 보편적이고 숭고한 가치가 포함된 행위로 높게 평가하였다.
이처럼 인도네시아 자바의 섬으로 갔던 조선인들은 전쟁 과정에서 독립영웅이 되었거나, 혹은 전범이 된 채 쓰러져갔다. 글 내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우선 일본이 일으킨 전쟁 책임을 묻고 그 점을 망각하고 있는 일본사회에 대해 고발하고 있다. 군무원들이 일본인 상관들과 겪었던 일상적인 차별이라든가 ‘내선일체’의 허구성을 이야기하며, 전범으로 몰렸던 군무원들도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희생양이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일본뿐만이 아니라 네덜란드나 연합군이 인도네시아에서 행했던 야욕을 드러냄으로써 제국주의 열강들의 폭력성을 고발하였다. 그 야욕의 굴레 속에서 쓰러져 간, 묻혀간 많은 이들을 소환해내고 위로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의미는 사뭇 깊다.
다음으로 ‘인권’이라는 말은 얘기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폭압적인 상황을 고발함으로써 인류애적 가치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타이-미얀마 철도 건설 과정, 인도네시아 각 섬의 비행장 건설 과정에서 포로와 억류자들, 노동자들에게 국제조약과 협약은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또한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과정에서 일본인과 조선인, 타이완인 등의 참가는 인종과 민족의 벽을 넘어선 인류애적 연대였다고 저자는 높게 평가하였다. 인류애의 중요성을 저자는 그 열정과 책임감들이 지금은 어디 있는지, 물으면서 글을 맺고 있는 것이다.
그밖에도 이 글은 쓰러져간 조선인들에 대한 한국 정부의 무관심에 대해서도 호소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참여했다 네덜란드군에 잡혀 사형당한 아오키, 하세가와, 양칠성 세 사람 중 앞의 두 사람은 일본의 유족 곁으로 유골이 보내졌지만, 양칠성의 유골은 찾아가려는 시도가 없었다. 고려독립청년당원들은 현재도 생존해 계시는 이상문 선생이 16번에 걸친 청원 끝에 2008년, 2011년과 2012년에 걸쳐 겨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을 수 있었다. 한국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두 일본인 연구자들이 인도네시아로, 싱가포르로, 일본과 한국으로 발로 뛴 노력 덕분에 그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이 책에 포함된 이상문 선생의 말에는 저자들이 이상문 선생에게 “세계 방방곡곡을 다녀서라도 반드시 증거 자료를 찾아낼 테니 좌절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기다려달라고 했다”고 한다(370쪽). 전쟁 책임을 망각하는 발언을 제기하는 일본사회의 일각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서도 곱씹어볼 부분일 것이다. 역사분쟁에서 한쪽의 잘못만을 비난하는 것은 문제의 적절한 해결책이 아닐 것이다. 한국사회에서의 성숙도 어느 정도에 와 있는지를 성찰하는 것도 한일간 역사분쟁의 해결, 동아시아 연대에 필요한 일일 것이다.
이 책의 아쉬움을 하나 이야기하고자 한다. 자료의 한계 때문이겠지만,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참여한 것 자체가 곧바로 ‘인류애적 가치’를 실현시켰던 것인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거기에 참여한 분들의 가치를 폄하하자는 것은 아니나, 참여에는 여러 동기들이 있을 수 있다. 그 점을 너무 쉽게 ‘민족을 넘어 선 인류애’로 처리한 것은 아닌가 의문이 생긴다. 그런 점들은 사실 이후 연구자들이 사실을 발굴하고 해석하면서 넘어서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끝으로 전범으로 사형당한 박성근이 사형 집행 전 불렀던 시의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피로 눈물로 얼룩진 조국 강산
순국의 선열들이 나를 부르네
기필코 나는 가리 선열들의 대열로
선열들은 진심으로 나를 맞으리(292쪽)
- 「종전행」이라는 노래에 「이국땅에서 잠들다」라는 제목으로 노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