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일의 라틴어 인생 문장 - 삶의 고비마다 나를 일으킨 단 한 줄의 희망
한동일 지음 / 이야기장수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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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한동일의 라틴어 인생 문장은 마치 <해리포터>의 주문처럼 읊조릴 만한 한 줄의 문장들이 담겨있는 마법서같다. 남은 문장들이 아까워 천천히 읽고 싶은 독자의 마음을 알았을까. 묵직한 하드커버이고 옆면은 금박으로 도련되어 있으며 금빛 책갈피끈이 있다. 마음에 새길 금빛 주문이 튀어나올 것 같다. 책의 외양에 마음이 홀린 것은 전작인 라틴어 수업을 감명 깊게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Nolite ergo solliciti esse in crastinum; crastinus enim dies sollicitus erit sibi ipsi: sufficit diei malitia sua.

놀리테 에르고 솔리치티 에세 인 크라스티눔; 크라스티누스 에님 디에서 솔리치누스 에리트 시비 입시: 스피치트 디에이 말리티아 수아. _p. 112

많이 들어봐서 익숙한 문장이었는데 라틴어로 읽으니 새삼 특별하게 느껴진다. 라틴어 까막눈이지만 라틴어 발음이 하단에 한글로 쓰여 있어서 아이들 앞에서 뭔가 있어 보이게 외칠 수 있었다. 어차피 우리 집에 라틴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없고 내 멋대로 억양과 어조를 넣어 유창한 듯 읽으면 그만이다. 엄마가 무슨 마법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들렸는지 아이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우리는 당장 해야 할 공부나 일을 뒤로 미루고, 훗날의 걱정과 고민은 당겨서 하길 좋아합니다. _p. 113"

병원에서 보호자로 보낸 시간들은 안 그래도 소심했던 나를 더욱 겁쟁이로 만들었다. 머릿속에서 똬리를 틀고 앉은 걱정은 끝이 없다. '스피치트 디에이 말리티아 수아' 이 문장은 당장 해야 할 일들은 뒤로 미루고 엄마로서, 딸로서, 며느리로서의 염려를 가불하여 오늘을 죽이고 있는 나에게 너무나 필요한 문장이다.

"인간이 하루에 느끼고 감내할 수 있는 절망과 고통을 계량화할 수 있다면, 그날 딱 하루치만의 고통과 절망을 느끼고 감당한다면 좋겠습니다. 내일 다가올 수도 있고 피해갈지도 모를 고통과 절망에 미리 주눅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고단한 하루하루의 가장 큰 성공은 죽지 않고 살아 있기로 선택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_p. 113"

오늘을 죽지 않고 살아 있기로 선택한 것만으로 이미 성공했다 말해주는 위로가 필요했었나 보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_p. 195"

행복한 삶을 추구할수록 비참해지는 기분이었다. 내게 주어진 상황은 쉽게 변하지 않았고, 갈구하던 것들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반드시 행복해져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에 저자는 '행복은 고단하고 지친 삶에 주어지는 사탕 같은 존재로 그 사탕 자제가 목표지점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반드시 행복해질 필요는 없다'는 말에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 그럴듯한 것들이 없는 내 인생에 만족하게 된다. 다만 주어진 것들과 시간을 견디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로 채워가는 태도, 행복감을 느낀다.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

Qui maledixerit patri suo vel matri, morte moriatur.

퀴 말레디세리트 파트리 수오 벨 마트리, 모르테 모리아투르. _p. 46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형벌을 내리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깎아내리고 자학함으로써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모는 사형과 마찬가지이지요. _p.48"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태어난 가난한 사람 (bominem pauperem de pauperibus natum; 호미넴 파우페렘 데 파우페리부스 나툼) 그것이 바로 나였습니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와 빚쟁이에 시달리는 가난하고 불화하는 가정에서 부모님을 원망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철이 들고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아이를 키워야 했을 부모를 향한 연민을 가지면서, 저자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절대 최고가 아닌 부모님을 최고라 정의한다.

그런 생각은 가지를 뻗어나가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을 '최고의 학생'이라고 믿는다. 부모님도 제자들도 최고라 정의했을 때 나 자신도 최고의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나 자신과 연결된 사람들을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 여긴다면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되고 만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이유를 어느 한 사람의 문제로 몰아가기는 너무나 쉽습니다. 물론 이것은 세상에 널린 쉽고도 흔해빠진 선택이었습니다. _p.25"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고 불편한 사람들이 있다. 한 사람의 문제로 몰아가며 미워하는 것은 나의 불행을 전가하는 쉬운 선택이었다. 저자는 이것이 내 안에 있는 불만과 미성숙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게 다 쟤 때문이야.' 책임을 넘겨 씌울 누군가를 계속해서 만들면서 나는 의로운 척 아닌 척 빠져나왔다. 말로 뱉어버려 주워 담을 수 없는 부끄러운 순간들이다.

"내가 극단적으로 미워했던 타인들은 가난한 내 영혼의 반영이었습니다. _p.88"


내가 이를 원하고 명령하니 의지는 명분을 위해 존재하여라.

Hoc volo sic jubeo sit pro ratione voluntas.

호크 볼로 시크 유베오 시트 프로 라티오네 볼룬타스. _p. 330

사극을 보면 시대를 막론하고 자주 등장하는 대사가 있다. "명분이 필요해."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명분이었다.

"당신이 배를 만들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목재를 가져오게 하고 일을 지시하고 일감을 나눠주는 일을 하지 마라. 대신 그들에게 저 넓고 끝없는 바다에 대한 동경심을 키워주어라. _ 생택쥐페리"

아이들에게 문제집을 나눠주고 시간표를 짜주는 것도 좋지만 먼저 아이들이 꿈꾸고 나가고 싶은 바다를 보여주고 싶다.


당신의 달란트를 잊지 마세요

Ne obliviscaris talentorum tuorum.

네 오블리비스카리스 탈렌토룸 투오룸. _p. 373

"눈의 잘 띄지 않는 어떤 재능은 범용적이어서 유용할 때가 많습니다. _p.373"

나는 그다지 똑똑하지 않고 말솜씨가 없으며 춤을 잘 추거나 노래를 잘하는 등의 끼가 없다. 내가 가진 달란트는 초라해보이고 남들의 화려하고 반짝이는 재능이 부럽다. 저자는 또렷한 재능이 아니라 조용히 누군가를 응원하는 재능처럼 '조용한 일상의 재능'을 가진 사람들의 활약이 더 많이 필요하다 말한다.


위로해줄 이들을 바랐건만 찾지 못하였습니다.

Sustinui qui simul contristaretur, et non fuit.

수스티누이 퀴 시물 콘트리스타레투르, 에트 논 푸이트. _p. 18

힘들 때 위로해줄 사람을 찾게 된다. 위로를 바랐건만 찾지 못하였다는 옛사람의 문장을 읽고 절망의 탄식이 몇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은 아닌가 하는 동질감을 느끼며 묘한 위로를 받는다.

내게 『한동일의 라틴어 인생 문장은 내가 필요할 때 아무 때나 불러낼 수 있는 위로다. 내가 무슨 일을 풀고 해결할 수 있겠냐마는 나도 위로를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에게 위로를 건낼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람들은 옳은 사람 말 안 들어. 좋은 사람 말을 듣지." 『송곳』 (창비, 2015)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증정 받아 솔직한 리뷰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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