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화 - 인정(認定)이론적 탐구 나남신서 245
악셀 호네트 지음, 강병호 옮김 / 나남출판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물화'라는 용어는 초기 마르크스의 소외론에서 출발하여, 무엇보다 루카치의 이론('물화와 프롤레타리아 의식')에서 체계적으로 발전했다. 

호네트는 '물화'라는 용어가 한때는 자본주의 비판에서 필수적 어휘였는데, 지금은 이론언어의 위치에서 망각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요즘에는 물화라는 병리학적 개념보다는 그저 민주주의의 부족과 사회정의의 결핍을 지적하는데 만족들 한다는 것이다(20). 

그러고 보니 지금처럼 '감정노동'을 위시하여, 스펙쌓기 등으로 스스로 상품(물건)이 되고자 몸부림치는 현 시대에 '물화'라는 것은 분명 일상적 용어로 번역되어 '울림'을 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용어로 보인다. 그런데 왜 물화라는 말을 잘 안쓰게 되었을까?  

'속물'들의 시대인 요즈음 속물들이야말로 '물건'이면서도, 과거보다 훨씬 심리적인 것 인격적인 것, 내면적 영성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요즘처럼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려 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 하는 시대가 또 있었는가 싶다. 

사실 하버마스도, 하버마스의 제자인 이 책의 저자 호네트도 '인격성'을 강조하긴 한다. 그만큼 '물화'에 대해 비판적이다. 하버마스의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라든지, 호네트의 '인정투쟁'이론은, 상호주관적 관계에서 상대방의 '인격적 속성'을 전제하는 듯하다. 하지만 속물들의 시대이자, 싸이코패스가 출몰하는 시대에, 인격적인 것에 대한 강조는 웬지 무력해보인다. 휴머니즘으로의 회귀처럼 보이기도 한다. 과연 '인간이라는 형상'에 호소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아감벤이 지적한대로, '인간'에 대한 규정 자체도 정치적 권력이 내리는 것 아닌가.

헤겔은 이미 오래 전에, 주체가 자기반성적 의식, 다시 말해 '대자적 의식'을 갖게 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이 사물이 되는 경험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루카치도 사물이 된 프롤레타리아에게서 대자적 의식, 즉 계급의식의 폭발을 기대했던 바 있다.  

그렇다면 속물의 시대이자 자기상품화의 시대인 지금이야말로 '대자적 의식'이 더욱더 만개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자신을 물건으로 경험하는 자들은, 부르주아들보다 더 세상의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내용의 루카치의 언급을 떠올려본다.  

그런데 진실에 가까운 건 가까운 것이고, 진실의 힘은 자본의 논리 앞에 무력해져 있다. 그리고 언론과 매체들의 선동은 이미 아도르노가 우려했던 선동기능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인터넷은 그저 분노의 배설공간에서 끝나는 것 같고.   

호네트는 물화는 바로 "인정의 망각"이라고 보고 있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호네트는 현대사회의 자기제시(self-representaion) 과제의 증가(자기소개, 면접, 특정 서비스 제공 등)가 개인들이 스스로를 물화하도록, 즉 자기물화하도록 추동한다고 언급한다는 점이다.(100) 인터넷을 통한 파트너 찾기, 마케팅 경향의 증가...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이 '보기 좋도록' 만들어야 한다. 왜? '인정'받기 위해서. 에바 일루즈는 호네트의 이러한 사유를 참조하여 <감정자본주의>라는 책을 썼다. 일루즈는 '치료요법'등 심리학적 담론과 실천의 유행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다. 내면과 인격을 강조하지만, 그러한 담론과 실천조차 물화의 증거일 뿐이라는 것이다.

물화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라는 질문만 남기는 독서이다. 어떤 근거에서 물화를 비판하고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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