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 / 마음산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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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문학, 그리고 사람에 대해 정확한 사랑에 도달하는 실험


하나의 세계가 온전히 들어가있는 소설이나 그 세계를 압축해 반짝이는 단어로 치환하는 시, 그리고 그것을 영상이라는 매체 속에 담아 버리는 영화라는 텍스트들은 그 자체로 어렵다. 세계를 구축하려는 치열한 작가의 고뇌를 내가 알 길도 없거니와 사상의 뿌리와 시대의 명확함, 단어의 함축성을 이해하기에는 지식이 짧고 생각이 얕아서일거다. 그래도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원초적인 표현 욕구를 가지고 있어서 글을 끄적일 수밖에 없는데 그러하기에 책을 읽은 후의 느낌(내가 남긴 글은 서평이 아니라 느낌 정도일 것이기에)을 난 항상 나만의 기준을 설정해두는 편이다. 그 기준이라 하는 것이 '독서는 글쓴이와 읽는이의 끊임없는 거래'이고 그러하기에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만 거래하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작품도 나에게는 읽을 가치가 없는 작품으로 절하되기도 하고, 어떤 작품은 심금을 울리면 그걸로 됐다고 이야기한다. 텍스트를 바라보는 내 느낌은 항상 이정도였다. 

허점이었다. 텍스트를 온전히 보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거래를 한단 말인가. 사소한 물건을 살 때도 특징과 성능 등을 꼼꼼히 따져봐야 거래를 시작하는데 텍스트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면서 무슨 거래를 한단 말이지? 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표현>을 격렬하게(그래, 격정적으로 읽었다) 읽으면서 텍스트를 보는 눈에 관해 나에게 많은 질문을 나는 스스로 던졌다. 평가 절하하는 것의 이유가 '나에게 닿지 않아서 별로다'라는 말이 얼마나 작가에 대한 모욕인가. 작가에게 합당한 근거를 들어 절하했던가. 또한 작가의 세계인 작품을, 그들의 글을, 그 글 속의 의미를 충분히 곱씹지도 못하고 사유하지도 않으면서 폐기하고 있지는 않고 있냔 말이다. 때론 이해불가의 문장으로, 때론 써먹을 만한 문장으로 구분해 하나는 쓰레기로 하나는 카피의 서랍으로 쓸어버리지 않았냐는 것이다.   

이 책은 영화 비평 에세이다. 문학비평가인 신형철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영화 비평을 하는 이야기의 모음이다. 영화 주간지 <씨네21>에 연재했던 글의 모음집이라고 책 머리에 나와있다. '영화라는 매체의 문법을 잘 모르는 내가 감히 영화평론을 쓸 수는 없다. 영화를 일종의 활동서사로 간주하고, 문학 평론가로서 물을 수 있는 것만 겨우 물어보려 한다.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하고'라며 스스로 말하듯이 이 비평글들은 영화의 기법에 대해 평하지 않으며 우직하게 서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도 텍스트이고 단지 영상이라는 매체를 이용할 뿐 결국 스토리, 즉 서사의 전달이기에 신형철은 영화를 문학에 대입해 풀어내는 비평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크게 '사랑의 논리', '욕망의 병리' '윤리와 사회' 그리고 '성장과 의미'라는 네 가지의 범주 속에서 각각의 영화를 분석하고 비평한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란 말이 무엇이란 말인가. 책을 읽은 후 나는 두 가지 범주의 '사랑'을 생각해봤는데, 하나는 '작품에 대한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또는 자신의 그녀)에 대한 사랑'이다.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신형철은 작품 비평을 '정확한 사랑'에 도달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작품은 모든 해석자들에게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다"고 말하며 해석자의 꿈이란 그러한 작품의 말에 정확하게 사랑을 해야한다는 의미다.(책머리 2쪽) 사랑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정확한 비평, 즉 이해와 분석을 치환하는 말이겠다. 그런데 다른 면의 사랑도 이 책에는 또한 읽혀진다. '이 책에 실린 글 중 하나를 나는 프러포즈를 하기 위해 썼다. 그녀를 정확히 사랑하는 일로 남은 생을 살아갈 것이다.'(책머리 3쪽)의 저자 고백처럼 이 비평문들은 영화를 통해 정확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고, 정확한 사랑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이다.

 

​비평을 하는 것도 어렵고 비평(인터넷에서는 흔히 서평)을 보는 것도 어렵다. 어떠한 작품을 평한다는 것, 재단한다는 것은 작품의 무게를 파악하지 못하고 감당하지도 못하기에 어렵다. 그래서 작품을 보고 글을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작품에 대한 감상을 허용하는 감상문 정도는 괜찮을텐데, 해석하고 논하는 것은 감상문의 범위를 넘어선다. 작품은 '정확히 사랑받고 싶다'고 아우성치는데 나는 겉만 핥는 성의만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비평을 보고 읽는 것도 쉽지는 않다. 비평가들의 분석이 언어의 조각들이 망망대해에 떠도는 것 같이 난해할 때가 많을 뿐더러 그들의 도구가 낮설다고 느껴서이다. 헤겔, 스피노자, 보통, 프로이트 등 수많은 철학자와 심리학자들이 난무하고 수많은 시와 소설에서의 인용을 이해로서 받아들이지 못할 때 비평에 발을 뗀다. 더욱이 치명적으로 비평문이 다루는 문학 작품이나 이 책에서 다루는 영화를 보지 못했을 때는 이미지를 생성하는 데 실패하고 비평을 온전하게 읽을 수가 없다.

​그런데 신기한 경험을 했다. 내가 보지 못한 영화라는 텍스트가 주가 이루는 이 비평문들은 너무나 반짝반짝하게 머리 속에 들어온다. 그의 생각은 신선했으며 사유는 논리적이었고 재미있었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 그 영화 장면 장면을 정지 상태로 놓고 읽어가는 듯한 느낌의 연속이었다. 아마도 서사로서 영화를 접근했기 때문이리라. 그는 놀랄만큼 치밀하게 작품들을 분석한다. 그 작품의 본질을 보려 노력하고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엄격한 사색을 통해 정리한다. 그렇게까지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이 비평가에게 작품은 '정확한 사랑'을 허용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작품에게 정확한 사랑을 받은 이 비평가는 나같은 평범한 독자에게도 사랑의 정확성을 보게 해주는 눈까지 제공하고 있으니 고맙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하였다. 비평문을 읽으면서 영화를 보았고, 영화 속 감독의 철학을 읽고 있었으며 작품에서 나타나는 삶의  의미의 가치를 계속 곱씹었다.

​특히 두번째 장(발기하는 인간, 발화하는 인간_욕망의 병리)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었던 홍상수와 김기덕 영화를 분석하는 장면과 <시> (미자씨가 시가 아니라 소설을 썼더라면)편은 빠져가며 재미있게 읽었다, 인간의 욕망이라는 사유는 본질적이기에 끌리는 주제일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표현해내는 두 거장의 접근법 (예를 들어 김기덕은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홍상수는 말에 초점을 맞춘다.)의 비교 분석이 신선했으며 작품에서도 '김기덕이 원형적인 인간을 다룬다면, 홍상수는 전형적인 인간을 다룬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인간의 본질을 나 역시 마음껏 탐구했기 때문이다. 또한 시와 소설의 갈래를 예전에 대학원에서 숙고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를 추억하며 <시> 비평문을 읽은 것도 하나의 기쁨이었다.이렇게 비평문을 읽는 독자를 끌고 다니는 능력이 아마도 신형철의 힘이 아닐까 한다. 이것 말고도 다양한 영화들이 나오는데 못 본 것들이 많아 보고 싶다라는 욕망이 꿈틀댄 것도 이 책의 재미를 이루는 원동력이었다.

 

신형철을 잘 몰랐다. 얼핏얼핏 그의 글을 보긴 했지만 그냥 흘려 보는 통에 차분히 그의 글을 음미하지 못했다. 책을 보면서 그는 참 정확한 사랑을 위해 실험하는 실험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해석학자라고 말하는 그는 더 좋은 해석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같다. 그게 작품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존경일 것이다. 나를 정확하게 이해해주라는 작품에게 그는 섬세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보듬는다. 그런 그의 글들을 보며 앞서서 이야기한 것 처럼, 나의 책읽기가 얼마나 부족하고 옹졸한지를 다시 한 번 느낀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사랑을 할 자격이 아직도 나에게는 부족하다고 느꼈으며 그러하기에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을 참 많이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지적 욕구 딱 좋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결여를 깨달을 때의 그 절박함으로 누군가를 부른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말, '나도 널 사랑해'라는 말의 속뜻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결여다.'(p25)

 

 

어떤 조건하에서 80명이 오른쪽을 선택할 때, 문학은 왼쪽을 선택한 20명의 내면으로 드어가려 할 것이다. 그 20명에게서 어떤 경향성을 찾아내려고? 아니다. 20명이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왼쪽을 선택했음을 20개의 이야기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어떤 사람도 정확히 동일한 상황에 처할 수는 없을 그런 상황을 창조하고, 오로지 그 상황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선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시도, 이것이 문학이다.(p65)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세 단계를 차레로 밟아가는 일이다. 그 세단계를 각각 '주석 '해석 '배치'라고 명명할 수 있다. 우리는 우선 텍스트가 다루고 있는 것들의 '사실'관계르 확인해야 하고(주석), 확인된 사실에 근거해서 텍스트의 '의미'를 추론해내야 함고(주석), 확인된 사실에 근거해서 텍스트의 '의미'를 추론해내야 하며(해석), 이렇게 추론된 의미가 어떤 '의의'를 갖는지를 평가하면서 그 텍스트가 놓일 가장 적절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배치).(p113)

 

 

좋은 이야기들에는 인간에 대한 경험함이 있어서 이런 말들이 들린다. "나는 나를 잘 모른다. 그러므로 너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그런 내가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 그리고 감히 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내가 나의 진실을 은폐하고 너의 진시을 훼손하지 않았는지 두렵다. 아마 나는 실패하리라. 그러나 멈추지 않고 계속 이야기할 것이다. 이것이 이야기를 하려는 자의 숙명이기 때문이다"(p143)

 

 

어떤 말과 행동이 장착할 수 있는 의미의 최대치가 100이라면, 우리의 말과 행동 중에서 많아야 20~30정도의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대체로 사려 깊게 이해받지 못하고 이내 흩어져버린다. 어쩌면 그것들에 우리의 가장 중요한 진실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런 것들을 놓치지 않을 때 영화는 지상에서 흐르는 어느 시간을 살아 있는 상태 그대로 보존하는 놀라운 기술이 된다. 문학에서 시간의 의미는 그 시간을 살고 난 이후 되돌아볼 때 얻어지는 어떤 깨달음의 형태로 효현된다. 그러나 영화에서 그것은, 그 어떤 깨달음의 형태로 굳어지기 전에, 그저 흐르고 있는 그 상태 자체로, 무의미가 아니라 미의미의 형태로 보존된다. 이것 또한 형화적 마술의 한 본질인 것이 아닌지.(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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