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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시장
이경희 지음 / 강 / 2022년 1월
평점 :
모란시장에 사는 삽교라는 늙은 개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소설.
개고기가 유명한 모란시장의 가장 큰 축산업을 하는 '대도축산'에서 애완견이라는 모순된 자리를 차지한 삽교는 몸과 정신이 많이 아픈 명진이라는 남자를 아빠라고 부르며 가족보다 가까운 사이로 지냅니다.
-...나는 아빠가 아끼는 애완견일 뿐이었다.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눈빛으로 말하고 위로하는 것만 가능한, 다른 종으로 살아가야 하는 지구의 생명체라는 것만 분명했다. _p.9
대도축산의 사장인 박사장은 이기적이고 윤리의식이 없는 인물. 그런 박사장과 가족의 생명을 담보로 억지로 결혼하게 된 경숙은 축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 개를 죽이는 일을 도맡아 합니다.
늘 무표정으로 가차없이 개를 죽이던 경숙이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갓난아기인 삽교를 발견했을 때는 죽이지 않고 숨겨뒀다가 명진에게 몰래 가져다줍니다.
한편 삽교는 아픈 아빠(명진)의 곁을 지키면서도 야생에서 만난 고양이 친구 송이와 같이 지내고 싶은 내적 갈등이 있습니다. 10년이 넘게 모란시장에서 지낸 터줏대감 삽교의 눈에 보이는 사람은 두가지 종류로 나눠지는데요.
생명을 중요하게 여기고 신념을 지키며 살아가는 좋은 사람.
사람 외의 생명은 사람을 위한 고기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나쁜 사람.
삽교의 이러한 명확한 시야로 보이는 시장 풍경은 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 안에서 작게 물결치는 희망의 불씨들이 그래도 우리 삶에 절망만 있지는 않다고 위로해주는 듯 합니다.
다양한 인물이 나오지만 삽교만의 나쁜 사람, 좋은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인물 관계도가 명확해지는 소설입니다.
잔잔한 듯 흘러가다가 한번씩 강력한 죽음의 냄새를 풍겨줘서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외유내강의 스토리이기도 하고요.
보통 시장을 묘사할 때 떠오르는 사람 사는 풍경, 인심, 따뜻한 분위기 등은 이 소설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모란시장>에서 말하는 시장은 '이미 죽어 있거나 죽기 직전의 것들만 진열된 곳'이니까요.
사람은 참 모순된 생물입니다. 작가는 삽교의 탈인간적 시야를 통해서 이런 모순들을 신랄하게 보여줍니다.
모란시장은 개고기가 가장 유명하고 개고기를 먹으려고 시장에 오지만, 정작 그 고기가 되는 개를 잡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합니다. 대도축산의 단골이라는 사모님들이 우연히 개잡는 모습을 보고 기겁하는 모습은 웃지못할 코미디입니다.
그리고 개 잡는 모습은 잔인하다고 하면서도, 도망가는 개는 얼른 잡아서 죽이라고 말하니 이게 어디에서 나오는 상식인지 소름이 돋아요.
-...그런데 박 사장보다 더 놀란 쪽은 좀 전까지 잔인하다고 했던 여자들이었다.
"어머나! 개들이 도망치잖아요."
"빨리 가서 잡아요. 돈 받고 이러시면 안되죠?"_p.151
비건은 환경오염이 대두되면서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붐이 일고 있는 사회현상 중의 하나 입니다. 무작정 고기를 먹는 사람을 비난하거나 축산업을 폐지하라고 강경책을 내놓을 수는 없는 현실이죠. 일거리 먹거리가 거기에 달린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적어도 그 죽음을 함부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이 소설은 말합니다.
-개들도 알아요. 자신을 죽이는 자가 누구인지, 그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생명을 끊어놓는지 다 알고 나서 눈을 감아요. 죽음을 막을 수는 없지만, 죽음을 함부로 대하고 싶지는 않아요. _p.199
도축전문가 경숙이 담담히 말하는 이 대사는 비약하면 도축에 대한 그럴싸한 면죄부지만, 피할 수 없이 얽혀버린 현실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윤리적인 태도라고 느껴졌습니다.
모든 생명은 분명 공평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선택에 따라 가족이 되거나 고기가 되거나 하는 개나 여타 동물들의 운명은 잔인하다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는 선에서 늘 노력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고기를 먹건 안 먹건, 그 어떤 죽음도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