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속가능한 영혼의 이용
마쓰다 아오코 지음, 권서경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2년 3월
평점 :
이 책은 세상의 모든 아저씨가 사라진다는 상황으로 시작됩니다. 그 상황이 실제인지 비유인지 알 수 없으나, '아저씨'라는 존재가 사라진 후로 소녀들은 자유를 얻게 되지요.
도대체 아저씨가 어떻길래 이 정도의 영향력을 준다는 건지? 처음엔 설핏 이해가 안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읽으면서 일본의 사정을 헤아려보니, 정말 이렇게 되더라도 이상하지 않겠더라구요.
우선 여기서 말하는 '아저씨'는 단순히 유부남, 40대 이상의 중년 남성 등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책 안에서 그 기준을 아주 명확하게 알려줍니다. 아저씨는 겉모습과 상관없으며, 아저씨임을 숨기려해도 소용없고, 젊더라도 아저씨일 수 있고, 심지어 여성 중에서도 아저씨를 찾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풀자면, 어린 여자 아이들을 포함하여 여성들을 착취하고 소비하는데 거리낌이 없고, 틈만 나면 성적 대상으로 접근하고, 여자는 무조건 자신에게 웃는 낯으로 사근사근하게 굴어야 한다는 정복욕에 사로잡힌 사람을 '아저씨'라 칭합니다.
-명백히 교복은 상대를 무시해도 된다, 건드려도 된다, 라는 표식이었다. 표적이 될 만한 외관을 유지한 채 살아가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은 굳이 진화의 역사를 읊을 필요까지도 없이 당연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여자아이들은 그것을 강요당하고 있다._p.141
이 책에선 일본 내에서 아저씨들이 어떤 식으로 여성을 소비하는지 여러 각도에서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 중 개인적으로 충격적이었던 건, 일본에서는 경구 피임약을 산부인과의 처방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찾아보니 정말 그렇더군요. 한국은 약국에서 쉽게 살 수 있기 때문에 상상도 못한 대목이었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경구 피임약을 취급하는 병원을 찾아가서 몇천 엔을 지불해야만 한다. 열악한 접근성과 높은 가격 때문에 주저하거나 포기하는 여성이 많다고 해도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_p.71
공원에서 놀고 있는 어린 여자 아이들의 사진을 찍으려고 어슬렁 거리는 남자에게 우리 아이를 찍지 말라는 한마디를 못해서, 자신들의 등을 모아서 아이들을 남자의 시선에서 가리려고 하는 엄마들의 모습. 그런 모습이 일상적인 풍경이라고 하니 머리가 띵해졌습니다.
일본에서 여성들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아저씨들에게 저항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외엔 없었습니다. 보이지 않게 저항하기, 즉 성추행을 당해도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비난받으면 그 장소를 떠나고 위협당하면 어떻게든 도망간다. 그런 게 여기서 말하는 저항의 현주소였습니다.
-여성을 그렇게 만드는 남성의 존재는 무시하고 여성만을 문제 삼고 비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 그 구조 자체는 결코 문제시하지 않고 말이야._p.62
이런 상황을 헤져나가는 인물들의 행보가 슈퍼히어로처럼 대담하거나 범죄 스릴러처럼 피 흘리지 않았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신선한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부당한 피해를 당한 대부분의 여성들이 바란 것은 대단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신이 웃고 싶을 때 웃고, 싫은 건 싫다고 말하고, 지키고 싶은 일상을 계속 유지하는 것.
기본적 인권을 지켜달라는 정도의 바람이었는데, 정말 보통의 우리는 일상을 잘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여자라면 한번쯤은 느꼈을 남자들의 불온한 시선과 태도들. 그들을 남자가 아니라 '아저씨'라고 통칭한다면 되겠다는 깨달음과 함께, 아저씨들은 보기완 달리 유리멘탈이니 겁부터 먹지 말아야겠다는 다짐도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