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시체답게 행동해! - 체코 SF 걸작선 체코 문학선 3
온드르제이 네프.야나 레치코바 외 지음, 야로슬라프 올샤jr.박상준 엮음, 김창규.신해경 / 행복한책읽기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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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작품들의 수준이 매우 높았다.

다소 경박한 느낌의 제목과 체코라는 생소한 지역 때문에 약간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첫 번째 단편을 읽고 나자, 이 단편집은 굉장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SF의 메이저는 아직 영미권이고 동구권의 SF들은 거의(스타니스와프 렘을 제외하고는 전혀?)들어오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 무시하고 있던 감이 있었는데, 이 정도의 글들이라면 영미권 SF에도 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까지 읽었던 몇몇 단편집들보다 더 좋은 것 같기도 하다.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꽤 암울하고, 칙칙하다. 과학 냄새보다는 공학적, 기계적인 느낌이 많이 나는 SF들이 많다. <우주 비행사 피륵스>라는 스타니스와프 렘의 작품이 떠오르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도 스타니스와프 렘의 영향이 보이는 단편들이 있기도 하고.

이런 느낌이라면 다른 동구권의 SF들도 읽어보고 싶다. 이런 기획을 성사시킨 행복한책읽기에 감사한다.

다음은 각 작품 감상

지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걸작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게임 내부/외부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며 게임의 내부와 외부가 어떤 식으로 상호작용하는지에 대한 고찰을 보여준 건 매우 인상적이었다. 게임 내부의 좀비물을 떠오르게 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인상적이며 절망적인 분위기가 잘 와닿았다. 또한 프로그램 내로 프로그램이 전송된다면? 의 모티브를 잘 살린 것도 좋았다.

영원으로 향하는 네 번째 날 - 관념적 대상과 물질적 대상의 대립 및 결합은 인상적이다. 도입의 액션 자체는 그렇게 흥미롭지 않았지만 시간과 물질, 그리고 세포를 결합하는 고찰은 SF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아인슈타인 두뇌 - 예전에 쓰여진 만큼 이야기 자체는 진부한 감이 있다. 다만 두뇌와 이야기를 하는 과정 그 자체는 흥미로웠다.

스틱스 - 수작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화성 표면에서 외계를 관측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인데, 자신이 쫓던 것이 허상이었음을 알았을 때의 허탈감이 매우 잘 와닿았다. 이후 이야기는 다소 급격한 전환을 맞는다. 발자국만으로 외계인의 모습을 추리하고 사라진 동료를 쫓는 과정은 탐사SF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었으며, 마지막에 보이는 새롭게 알게 된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좋았다.

브래드버리의 그림자 - 이 단편집 내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다. 얼마 전에 ‘화성 연대기’를 읽었기에 약간 이해가 수월했던 면도 있었지만, 굳이 브래드버리의 이름을 넣지 않아도 좋았을 듯 싶다. 기억을 형상화하는 거대 지성체에 대한 이야기는 브래드버리보다는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가 떠오르게 하는 편이 더 많지 않나 싶다. 사라진 동료를 구하기 위한 과정의 세밀함과 기억에서 떠오른 유령들이 마찰하는 장면은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의 진짜 ‘화성 연대기’가 떠오르게 하는 결말까지. 걸작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제대로 된 시체답게 행동해! - 표제작이지만 SF보다는 판타지에 더 가까운 느낌의 내용이었다. 카르밀리온이라는 의문의 약물이 나오긴 하지만 그것에 대한 매커니즘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설명이 되지 않았고, 저승과 이승의 경계나 그런 것들에 대한 설명 또한 부족했다. 하지만 글 자체는 재미있었다. 칙칙한 분위기의 하이틴 로맨스는 그 자체로도 매력이 있다.

비범한 지식 - 얇은 분량만큼이나 단순한 아이디어지만 그 상황으로 인한 유머가 재밌다. 나름 인식의 차이란 측면을 잘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양배추를 파는 남자 - 걸작이라 부를 만하다. 짧은 분량이지만 그 안에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강박증적인 방사능에 대한 거부, 위태로운 분위기, 외부인에 대한 두려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 양배추를 파는 남자에 대한 묘사는 섬뜩하며 어째서 그가 그렇게 되었는가에 대한 서술은 인간 사회의 어떤 단면을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집행유예 - 이슬람 율법이 일반법이 된 사회를 다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SF적인 분위기는 별로 나지 않는 듯. 디스토피아적인 사회에서 피를 팔아서 살아야 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충분히 인상적이지만, 다소 갈등이 약한 느낌이 있다.

소행성대에서 - 술집이 나오는 것부터 그렇고, 글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하드보일드 범죄소설을 떠오르게 한다. 개인적으로 감각의 제한이란 측면에서 하드보일드 소설의 주인공으로 가장 잘 어울리는 건 사이보그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생각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는 단편이기도 했다. 소행성대에서 광물을 캔다는 설정은 흥미로웠으며, 주인공에게 닥치는 범죄와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다소 요약적인 서술이 아쉽긴 하지만 충분히 즐거웠다. 단편집의 마무리로써 손색없는 상쾌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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