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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1999년 8월
평점 :
절판


컴맹이니 넷맹이니하며 첨단문명의 이기를 사용할 줄 모르는 이들을 일컫는 신조어를 오래전부터 사용해온 말처럼 익숙하게 듣고 쓰고 하는 요즘이다. 너나할것없이 그 무슨무슨 盲이라는 과히 명예스럽지 않은 호칭으로 불리워지지 않기위해 여간 애를 쓰는 것이 아니다. 아마 시대에 뒤떨어진 무능력한 사람으로 보여지는일이 매우 부끄러이 여겨지기 때문이리라.

옛그림을 볼랴치면 그림속 빈공간에 씌여진 화제며 여기저기 찍힌 도서니하여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이 가득하다. 기껏해야 100여년전에 살았던 분들이 읽고 쓰고 하였던 문자를 21세기에 사는 나는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라도 보는양 전혀 판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옛어른들이 지금의 우리를 본다면 무어라 하실까? 그림을 보되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으니 화맹이라할까?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니 문맹이라 하실까? 아니 어쩌면 '모름'을 부끄러워 않는 그 무딘 마음을 더 나무라지는 않으실런지... 오주석선생의 따사로운 눈을 통해 비로소 나는 옛그림속으로 더듬더듬 걸어들어간다. 여백이 많은 쓸쓸한 화면, 원근법은 아예 무시한듯한 다 쓰러져가는 초라한 집한채, 나무 네그루, 그리고 먹이 채 묻어날것같지도 않은 까칠까칠한 마른붓으로 쓸어내듯 그린 마당... 이그림이 진정 문인화의 정수라 일걸어지는 추사의 명작 '세한도' 였던가? 나의 이런 의아함에 대한 대답이라도 하듯 저자는 우리 옛그림을 눈으로만 보지말고 마음으로 보아야함을 나직하게 일러준다.

추사는 세한도에 집을 그리지 않았다. 유배생활의 역경속에서도 올곧이 지키고자 했던 선비의 기개, 즉 그 집으로 상징되고 있는 자기자신을 그렸던 것이다. 세간의 매운 인정과 그로인해 씁쓸한 선비의 굳센의지, 옛사람의 고마운 정 필설로 다하기 어려운 많은것들이 세한도 한 장에 담겨져 있음을 저자는 옛사람의 어진 눈길을 통해 오늘의 목소리로 내게 얘기해주고 있었다. 선인들은 사물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보았다고 한다. 마음을 그리는 것이었으므로 눈에 보이는 형태 그자체에는 얽매이지 않았으며 이러한 풍토에서 점차 색채를 배제한 수묵화의 전통이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눈보다는 마음으로 보고 사물의 외면보다는 본질을 드러내고자 하는 정신이 바로 '수묵의 마음'이란다. 그랬었구나. 그런것이었구나. 현란한 도시의 불빛과 요란한 소음에 이끌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기에 바빴던 나의 눈으로는 세한도는 결코 이해되어질수 없는 옛사람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흔히 동양회의 미는 '여백의 미'라고들 한다. 무엇이든 가득히 넘치도록 채워야만 직성이 풀리는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동양화의 여백은 빈공간일 뿐이요, 그저 썰렁한 그림 한장일수도 있다.

'빈 하늘이 있은 후에야 휘황한 달이 아름답고, 아지랑이 서린 아득한 공간이 있어야만 그앞에 피어난 한줄기 댓가지가 풍요롭게 보인다' 저자의 표현처럼 우리의 삶도 늘 빽빽이만 채우려 애쓰지 말고 그야말로 마음의 여백을 한켠 남겨두는 일이 필요하지 않을런지... 이런 마음의 여백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옛그림을 그린 이들의 어진 마음자리에 가 닿을수 있는 것이 아닐까? 폭염의 계절이다. 대숲속에서 불어오는 한줄기 맑은 바람이 그리운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픈 책이다. 이책에서 분명 '여백의 마음'을 만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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