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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광야에 서다 - 제1회 디지털 작가상 역사.팩션 소설 부문 당선작
고유 지음 / 문이당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최초의 길이 항상 영광스럽지는 않았다
19세기 말 조선은 끔찍한 상황이었다. 사방은 열강들에 둘러막혔고, 그 안에서 조선이란 나라는 더 이상 존속할 힘이 없어 보였다. 당장이라도 다른 나라의 속국이 되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수백 번의 외세의 침략 속에서 이다지도 막막한 적이 있었던가? 게다가 하나의 적을 상대해야 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서양의 강대국들과 동양의 새로운 열강들이 벌떼처럼 이 작은 땅덩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드디어 이제는 그만 왕조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민족이 갈려야 될 때인 듯싶었다.
벌레처럼 밑바닥을 구물구물 살아가던 백성들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몰랐다. 그저 사는 게 나날이 힘들어간다고만 생각했다. 뭔가 흉흉하다고도 생각했다. 나랏님이 하라는 대로 부역도 하고 세금도 바치는데 왜 이렇게 불안할까? 사실 나라를 다스리시는 높으신 분들도 잘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보려면 볼 수도 있고 들으려면 들을 수도 있으련만 지금 이 순간이 편하고 놓치고 싶지 않아 그저 눈 감고 귀 막고 이대로 내 한 평생 일족들과 호의호식하면 살겠거니 걱정 따위는 밀쳐버렸다. 그렇게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왕국, 조선이 깊은 멸망을 향해 천천히 굴러 내려가는 때였다.
그 암흑 같던 시기, 최초로 근대적 쿠데타를 일으킨 혁명가였고, 최초로 서양 의술을 배운 의사였으며, 최초로 사설신문을 창립한 언론인이었던 사람이 있다. 소설 『서재필 광야에 서다』는 바로 그 험난한 최초의 길을 걸은 투사 서재필이 오랜 미국 망명 생활 끝에 조선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팩션을 좋아하는 탓에 집어든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눈앞에서는 요즘의 불안하기 짝이 없는 작태가 오버랩되었다. 사실 지금의 상황도 그때와 뭐가 다를까? 여전히 위정자들을 믿을 수 없고, 그 정책은 이해되지 않으며 정치가라는 게 도대체 누구의 이익과 권리를 보장하는 단체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 요즘 안 그래도 시끄러운 광우병 사태와 맞물려서 이 책이 허투로 읽히지가 않았다. 뭐든지 시작은 작은 것이었다. 처음엔 그저 바늘만 팔겠다고 사정하며 팔다가, 바늘을 파니 은근슬쩍 실도 끼워 팔다가, 그 실로 꿰맬 옷감도 필요하지 않겠냐며 스리슬쩍 밀어 넣고, 이내 옷 만드는 공장을 번듯이 세워 내국인을 착취하며 큰소리 땅땅치는 식으로 조금씩 들어왔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또 모르지 않을까?
하지만 여전히 위정자들은 죄다 등산가만 있는 건지 “안 돼요, 안 돼요, 돼요, 돼요, 돼요” 메아리나 지르고, 국민들은 지겹지도 않은지 눈 뜨고 앉았다가 뒤통수 맞는 일을 또다시 반복하고 있다. 사실 나 역시 그 동안 나 살기 바쁘다고 정치에 둔감하고 내 주머니와 상관없으면 니 주머니야 깨지든 말든 참견하면 오지랖이려니 하고 살아온 게 사실이다. 열심히 내 앞가림이나 하며 살터이니 정책이며 외교며 귀찮은 것들은 좀 알아서 해달라는 명백한 책임 전가를 당연시 여기며 지금까지 외면했다. 4월 총선의 최악의 참여율이 그 명백한 증거이다. 스스로 방기한 책임과 의무가 기어코 이런 식으로 돌아오는구나 싶다.
구한말의 어이없고 원통하던 시절, 그 원통함의 크기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그래도 나라와 민족을 생각한 인물들이 묵묵히 가시밭길을 걸으며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졌다. 서재필도 그 중의 하나였다. ‘최초의’라는 수식어가 그렇게 고통이 될 줄은 몰랐다. 그도 미리 알았다면 가능하면 그 길을 피해 걸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걸어야 되니 걷는다는 그 우직함에 대해, 수혜를 받은 나로서는 그저 고마울 밖에 다른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역사는 여전히 현재를 보여준다. 그러면 이제는 어떡해야 할까? 하도 세상이 흔들리니 나도 나를 못 믿겠다. 위정자들의 주장도 언론의 보도도 나의 판단도 믿을 수가 없으니, 어디 누구 믿을 만한 사람 없을까 찾다 보니 웃음이 나온다. 복잡하고 귀찮다고 타인에게 판단을 유보했다가 이 지경이 된 것을 뻔히 눈 뜨고 바라보면서 또 다른 초인(超人)을 찾는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서재필, 그가 걸은 길에 대해 누군가는 걸어야 할 길, 오욕으로 범벅이 되어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라면 누군가는 매어야 할 총대라고 그럴듯하게 말하면서, 나는 이번에는 누구에게 그 길을 걸으라고 등 떠밀어 떠넘기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