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 취소
호영 지음 / 읻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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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와 이야기>

호영은 사람을 초대하는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거나 혹은 과거의 자신을 인용한다. 많은 사람을 초대한 '전부 취소'는 조금 더 풍요롭다. 호영 덕분에 많은 좋은 글을 얻어갔는데, 이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얻어가는 것과 비슷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해 읽으며 나의 미숙함들을 채워갔다. 비록 호영의 어휘가 조금 과격할지라도, 호영의 언어들에 솔직함이 담겨있었다.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호영을 조금 더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동시에 나의 생각들도 조금 달라지고 있었다. 그 생각들과 관련해 공유하고자 한다.


< 나에게 수식되는 것들 >

내 이름 앞에 무언가 수식되는 일은 무척 무서운 일이다. A의 연인, 회장, B의 친구, 00학교 출신 등 우리는 흔히 그 사람의 아는 정보를 수식으로 붙인다. '끼리끼리'라는 법칙 아래 수식되는 사람들과 우리는 동일시되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강력한 이유의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수식어라면 더욱 그 수식어를 떼내기 어렵다. 호영의 경우, '트랜스젠더이고 따라서 정신병자이므로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주시해야 한다거나, 내가 가진 자질이나 의사결정의 타당성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라고 덧붙인다. 즉, 호영이 커밍아웃을 했다면 회사에 있는 동안 수식어를 떼어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내 이름에 수식어가 붙는 일은 동시에 수식어의 책임을 짊어진다. 그때마다 숨기려고 애쓰는 건 호영뿐만 아니라, 나도 그랬다. 나의 앞에 수식어가 붙은 건 나를 단정지어 생각하는 것이기에 매우 안 좋아한다.


< 누군가 죽으면 나도 함께 죽는다 >

호영은 엄마를 떠올리며 '누군가 죽으면 그 사람이 기억하던 나, 그 사람과 놀 때만 나오던 나도 죽게 된다'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누군가가 죽으면 왜 그렇게 슬플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사람과 나 둘만이 공유했던 기억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즉, 그 사람이 아는 내가 사라진다. 둘만의 기억을 누구와도 공유하지 못할 때 오는 슬픔들이 있다.

그러나 호영이 말했듯, '예전의 나는 연속되며 연속되지 않는다'. 즉, 그 사람이 죽어도 나는 연속된다. 그 사람과 있었던 나 덕분에 지금의 내가 되어있다. 이는 예전의 내가 있지만, 없는 일. 그래서 우리는 조금 더 내가 되어가고 있다.


<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

우리는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애쓰지만, 그렇지 않아도 될 때가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해보다 인정'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해까지 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곤 나도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럴 수 있다'라는 말들로. 호영은 "불특정 다수의 인정을 받아야만 내가 나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이라고 말한다. 내가 나로 살기에 인정이 무조건 필요한 일은 아니지만, 인정이 있으면 조금 덜 외롭다.

호영은 덧붙인다. '성별 정체성이라는 건 나 혼자 내가 누군지 안다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인식을 통해서도 만들어지기 때문에 처음 만나는 누군가가 내린 찰나의 판단으로 인해 고꾸라지는 일들이 생긴다. 한 사람의 판단, 한 가게의 내규가 내 앞의 문은 벽이기도 하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나에게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판단을 할 때, 우리는 조금 더 조심스러워져야 한다.


< 조금 모르겠는 방식으로 >

사람을 만날 때, 우리는 호칭에 대한 고민을 한 번씩 거친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선배, 형, 오빠, 언니, 누나, A씨 등 다양한 선택지들 중 우리는 어떻게 그 사람을 불러야 하나 고민한다. 그럴 때면 서로 합의를 거치는 과정은 매우 예의처럼 느껴진다. "당신은 어떻게 부를까요?"라는 말이 그 사람과 잘 지내고 싶다는 말을 포함하고 있다. 그때 동시에 말을 놓기도 하며, 서로 친해지기 편한 사이가 된다.

우리는 지금 이분법으로 나누어진 세계를 살고 있다. 밸런스 게임을 할 때 겪는 지옥들처럼 우리는 둘 중 하나를 무조건 '선택'해야 하기도 한다. 이는 때론 강제적이다. 그때마다 나는 '모르겠다'라는 답변을 매우 좋아한다. 몰라서 '선택하지 않겠다'가 아닌, 무언가를 '선택할 수 없는 상황'임을 뜻하는 말이 좋다.

무언가를 선택하는 데에 있어서, 어딜가나 중간지점이 있다. 나는 자주 '중간지점'을 택한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지금은'이라는 말을 앞에 덧붙이는 것. 혹은 점심메뉴를 선택할 때, '나눠먹자'는 선택지를 결정하는 것. 우리는 이분법의 세계에서 벗어나 조금은 모르겠는 방식으로 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 연결되기 위한 언어들을 약속하기 >

내가 모른다고 해서 미뤄왔던 세계들을 마주했을 때, 나는 언어에 관해 약속했다. '언어는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지정되는 것이기도 하며, 우리는 매일 소소한 협상을 하면서 서로 연결되기 위해 지정된 언어를 받아들입니다. 그렇지만 누구도 타인의 가장 사적인 진실까지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언어를 구사하면서 서로 이해하려고 애쓴다. 그때마다 서로를 깊이 파고들 순 없겠지만 인식하고 뒤엉키면서 우리는 고민한다. 당신에게 연결될 수 있는 언어가 무엇인지. 그것은 비로소 우리의 약속으로 이어질 것이다.

만약 커밍아웃을 했다면, 회사 내 대다수의 사람에게
그 소식은 커피 마시면서 언급할 가십거리 정도였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몇몇 사람에게는 내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이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수식하게 될 것이다. - P46

어디선가 읽었는데
누군가 죽으면 그 사람이 기억하던 나
그 사람과 놀 때만 나오던 나도 죽게 된다
예전의 나는 연속되며 연속되지 않는다 - P76

곧 만나게 될, 또는 방금 만난 사람의 젠더, 성별, 성적 지향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정을 붙들고 있지 않는 것.
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부르길 원하는지 말하기 전까지는 기다리는 것.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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