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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을 잃고 나는 쓰네 - 벗의 죽음 앞에 글로써 울분을 토하다
임채성 엮음 / 루이앤휴잇 / 2016년 12월
평점 :
모든 죽음은 큰 슬픔을 머금고 있다. 살아서는 두번 다시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회한이 얼마나 깊고 사무치랴. 생각건대,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쉬이 말할 수 없으리라.
희로애락을 함께 했던 벗이 사라진 세상은 얼마나 슬플까.
[벗을 잃고 나는 쓰네]는 벗을 먼저 보낸 문인들이 벗의 삶과 작품, 그리고 함께 했던 추억을 회억하는 책이다. 제목에서부터 깊은 슬픔이 느껴지지만, 책속의 문인들은 애써 눈물을 참아가며 함께 했던 기억을 끄집어내놓는다. 글로써 통곡하고, 글로써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짐짓 태연해보이는 글이지만, 읽다보면 무심결에 눈물이 또르르 맺힌다.
이상은 사람과 때와 경우에 따라 마치 카멜레온과 같이 변한다. 그것은 천성보다도 환경에 의한 것이다. 그의 교우권이라 할 것은 제법 넓은 것이어서, 물론 그 친소(親疎)와 심천(深淺)의 정도는 다르지만,
한 번 거리에 나설 때마다 거의 온갖 계급의 사람과 아는 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_ 박태원, <이상의 편모>
그는 어떤 완성된 형식 안에다가 자기의 주장을 집어넣으려는 전통적 작가가 아니라
현대 문명에 파양(破壤, 깨뜨려짐)되어 보통으로는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개성의 파편 파편을 추려다가 거기에 될 수 있는 대로 리얼리티를 주려고 해서
여러 가지 테크닉의 실험을 하여 본 작가올시다.
_ 최재서, <故 이상의 예술>
세상에 법 없이도 살 사람이 유정임을 절절히 느꼈다. 공손하되 허식이 아니요,
다정하되 그냥 정(情)이요, 유정에게 어디 교만이 있으리오. 그는 진실로 톨스토이(유정의 마지막
일작(逸作) <따라지>의 등장인물로 누이에게 얹혀살며 글을 쓰는 무기력한 존재)였다.
_ 채만식, <유정과 나>
인사할 때 얼굴에 진정 반가운 빛이 넘치고, 이를테면 ‘수줍음’을 품은 젊은 여인과 같이
약간 몸을 꼬기까지 하는 것이 지금도 적력(的歷, 또렷또렷하여 분명함)하게
내 망막 위에 남아 있는 유정의 인상 중 하나다.
_ 박태원, <유정 군과 엽서>
한 솥의 밥을 먹고, 한 이불 속에 잠을 자고, 한 책을 둘이 펴던 시절이 무던히 길었나니.
실상 벗은 그때 아직 문학이니, 시를 생각하지도 않던 때로,
내 공연히 벗을 끌어들여서 글을 맞붙이게 하고, 글재주를 찾아내려 하였던 것이니,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일생에 큰 죄를 지은 듯싶다.
_ 김영랑, <故 박용철 조사(弔詞)>
시인 김기림은 박태원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봄이 오니 형도 <제비>가 그리우신가 보오. 돌아오지 않는 <제비>의 임자는 얼마나 야속한 사람이겠소? 그래서 나는 동경을 지날 때는 머리를 숙이오.”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김기림의 시 <바다와 나비>다. 이 시는 그가 이전에 쓴 시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다. 이국적 정서를 드러내는 낯선 외래어도 없고 서구 문명 세계에 대한 동경도 없다. 오히려 알 수 없는 슬픔과 생의 질곡이 느껴진다. 그는 과연 무엇이 그리 슬펐을까. 혹시 여기서 말하는 나비는 바다 건너 낯선 땅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던 벗 이상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의 못다 이룬 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현실을 슬퍼했던 건 아닐까.
비록 그들은 떠났지만, 지기(知己)가 있던 그들의 삶은 이토록 아름답고, 우리를 눈물짓게 한다.
실컷 눈물을 흘리고 싶거나 먼저 떠난 벗이 그리운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