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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의 아이들 - 작은 아씨들 3,4부 완역판 ㅣ 걸 클래식 컬렉션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김재용 외 옮김 / 윌북 / 2020년 9월
평점 :
어린 시절 내가 제일 좋아했던 책을 세권 꼽으라면 빨강머리 앤과 소공녀, 그리고 작은아씨들이었다.
사촌언니에게서 얻은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의 <작은아씨들>을 표지가 닳을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어렸을 때 엄청나게 낯가림이 심했던 나는 먼저 내성적이고 피아노를 좋아하는 베스에게 끌렸고, 좀 더 크고 나서는 당연히 조에게 끌렸다.
한창 작은아씨들을 읽을 무렵이었던 94년, 영화 작은아씨들이 개봉했고 당시 좋아하던 위노나 라이더가 조를 맡는 바람에 나는 또 기대감에 부풀어 영화를 보았다. 영화 음악이나 분위기, 배우들 모두 기대하던 그대로의 영화라, 나는 또 이 영화를 비디오로 녹화해서(아 옛날사람) 두고두고 외울 정도로 보았다. 조 역의 위노나 라이더, 베스 역의 클레어 데인즈, 어린 시절 에이미 역의 커스틴 던스트, 로리 역의 크리스찬 베일, 엄마 역의 수잔 서랜든까지...당시 핫한 배우들로 이루어졌으며 내가 생각하던 등장인물들의 이미지와도 너무 찰떡이었기에 나는 이 멤버가 아닌 작은아씨들은 상상할 수 없었다.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퍼지며 극장에서 영화 한 편 보는 것 조차 조심스러워지기 시작하던 지난 2월, 2019년 버전의 작은아씨들이 개봉했고 시얼샤 로넌의 조가 궁금해 참을 수 없었던 나는 혼자 마스크를 쓰고 영화관에 가서 작은아씨들을 보았다. 머리털나고 처음 혼영이었다. 너무너무 익숙한 첫 화면이 브라운관에 펼쳐지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사실 베스나 에이미, 로리 역할이 너무 원작과 동떨어진 느낌이라 몰입은 좀 힘들었다. 내게는 94년 버전이 베스트!). 심심하면 방에 쭈그려앉아 작은아씨들을 펼쳐 읽던 어린 시절이 눈앞에 펼쳐졌다. 반가움과 그리움이 교차했다.
윌북을 알게된 건 바로 이 작은아씨들 때문이었다. 교보문고를 지나가는데 내 취향을 완벽히 저격하는 예쁜 하드커버의 책이 나를 사로잡았다. 작은아씨들. 아 너무 예쁘다. 빨강머리앤은 여러 출판사 버전을 가지고 있지만 작은아씨들은 계몽사 책 한권 뿐이니 나를 위해 사치를 부려볼까. 작은아씨들을 시작으로 나는 윌북 서포터즈가 되었고 흔히 알고 있는 작은아씨들의 후속편이자 완역판의 3,4부에 해당하는 <조의 아이들>을 서포터즈 자격으로 받았다. 미친듯이 기뻤다. 무려 천페이지가 넘는 어마어마한 두께에 생각지도 못했던 초면인 다수의 등장인물의 향연도 상관없었다. 첫 페이지를 펼치자 내가 좋아하는 곽아람 작가님의 추천사가 있었다. 추천사부터 감동받으며 읽고 <3부>라 적혀있는 페이지를 넘겼다. 내가 그리워하던 익숙한 작은아씨들의 세계가, 아직 거기에 있었다. 로리가 조에게 실연당하고 에이미와 결혼하고(내게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조가 독일인인 바에르 교수와 결혼하며 학교를 세우는 것으로 끝나는 줄 알았던 <작은아씨들>이 그 후의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 내가 모르는 그 후의 이야기가 천 페이지가 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모든 체력과 면역력이 저하되어 각종 증상과 질환이 나타나기 시작한 마흔의 애엄마를 다시 십대 시절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매일 밤 애를 재우며 같이 뻗었다가 겨우 몸을 추스려 남은 집안일을 하고 씻고 나서 새벽에 열심히 눈을 비비며 두꺼운 책을 읽었다. 출퇴근 용으로 가당치도 않은 두께와 무게였으나 한 장이라도 더 읽고 싶어 회사로 책을 이고 지고 갔다. 그렇게 나는 다시 조와 에이미와 메그와 로리를 만났고 플럼필드의 아이들을 만났다.
p.184
온 세상의 어린 마음과 영혼에 가장 필요한 건 사랑과 보살핌이고, 그 따스함은 아름다운 꽃을 활짝 피어나게 해준다.
p.288
"하느님은 왜 밤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어. 낮이 훨씬 재미있는데." 낸은 생각에 잠겨 말했다.
p.426
"열심히 보면 이 현미경으로 사람의 영혼도 볼 수 있을까요?" 작은 유리 조각의 위력에 감동한 데미가 물었다.
"아니란다,얘야. 그렇게까지 대단하지는 않아. 그런 건 만들 수도없지. 보이지 않는 신비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네 눈이 맑아지려면 아주 오래 기다려야만 할 거야. 하지만 네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 보이지 않는 더 아름다운 것들도 이해하게 될 거다." 프리츠 이모부는 데미의 머리에 손을 얹고 대답했다.
p.460
선함은 명성과 돈이 사라질 때도 계속해서 남는 것이고,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도 가져갈 수 있는 유일한 재산이란다.
p.684
어디선가 읽었는데, 영국 해군에서 쓰는 밧줄에는 모두 붉은 가닥이 들어 있다더라. 어디선가 발견되면 알아볼 수 있게 말이야. 이게 바로 너에게 해주는 작은 설교란다. 명예, 정직, 용기 같은 덕목은 훌륭한 사람임을 알려주는 붉은 가닥이야. 어느 곳에 있는 사람이든 마찬가지지. 어딜 가든 항상 그 가닥들을 몸에 지니렴.
마지막 장인 1015페이지를 넘기며 나는 어린 시절의 여행을 마치고 현실로 돌아왔다. 어린 시절이 끝났음을 깨닫는 것은 늘 왠지 모르게 서글프다. 하지만 언제든 이 두꺼운 책을 펼치는 것 만으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이젠 나 대신 우리 은총이가 그 시절을 꽃피우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기에 더욱 감사하다. 소중한 추억여행을 하게 해주신 윌북 출판사에도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