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 그런 나는 없다
홍창성 지음 / 김영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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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 그런 나는 없다를 통해 무아가 진리임을 보여주는 논증 과정을 검토해 가는 여정을 담은 책이다.

 

나는 누구인가에서 출발한 철학서적들은 심오하고 어렵다. 말장난 같기도 하고 말꼬리 잡기 놀이 같기도 하고. 과거 철학자들은 이런 주제로 논쟁을 벌였다니 자아에 대해 그 옛날부터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무아 그런 나는 없다를 보면, 서양철학과 불교의 붓다 가르침의 충돌을 그리는데 신기하고 새로웠다.

 

서로의 철학이 맞는다고 논증 과정을 보여주는데 결국 무아 그런 나는 없다의 필자는 심리철학, 불교철학 논문을 쓰고 주된 공부를 하였으니 그가 주장하는 불교철학 붓다의 무아론이 이길 수밖에 없는 과정이겠다.

 

무엇이 옳고 그름이냐, 맞고 틀리냐 보다 지금의 자신을 성찰하고 돌아볼 수 있는 시간으로 삼으며 무아 그런 나는 없다를 읽어 보면 좋을 것 같다.

 

붓다는 세계 주요 종료의 창시자 중에 유일하게 철학 논증을 구사했던 분이라고 한다.

 

붓다의 비재귀성 원리로부터의 논증

 

굉장히 어려워 보이지만 예시를 들어보면 쉽다. 눈은 사물을 보지만 그 스스로를 볼 수 없다. 코는 냄새를 맡지만 그 스스로를 냄새 맡을 수 없다. 이 모든 논의는 '아무것도 그 자신을 향할 수 없다'라는 통찰을 기반으로 한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영혼이 자신의 몸과 의식을 조정하며 통제한다고 믿어왔다고 한다.

 

예를 들어, 나는 뚱뚱한 내 몸이 싫어 살을 빼서 날씬한 몸매로 변화시키고자 한다. 이 말은, 나는 내 몸으로 향할 수 있다는 뜻이다.

 

불교 붓다의 논증은 아무것도 스스로 향할 수 없다는데, 서양철학은 나는 내 몸으로 향할 수 있다고?

 

따라서 불교 붓다의 논증에 의하면 나는(아뜨만 또는 참나는) 내 몸이 아닌 것이다.

 

비단 몸뿐 아니라 의식상태도 논증이 적용된다. 서양에서, 나는 감정 의지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변화시키고 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흔들의자의 안락함이 좋고, 성공한 친구를 시샘하면 안 된다고 결심한다. 말하자면, 나는 이런 것들 하나하나 마음과 의지로 향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붓다의 논증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무것도 스스로를 향할 수 없다고 하였다. 결국, 몸과 의식 어떤 것도 내가 아니라며 진정한 나, 즉 아뜨만이나 참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자녀를 가진 아버지가 만약 불의의 사고로 자녀를 잃게 된다면 그는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다.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 의해 잠시 본인에게 머무르는 명칭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누구에게도 영원불변 불멸의 본성도 부여해 줄 수 없다고.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아도 불교의 붓다의 논증은 '무아는 진리의 가르침'이라고 말하고 있다.

 

서양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는 바꿔 말하면 존재하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다는 말과도 같다.

 

작가는 데카르트의 서양철학이 불교의 무아론에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도전은 어떻게 바라보는 지도 재미있다.

 

생각함 그 자체는 다양한 의식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고정불변의 '나의 존재'와는 거리가 멀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데카르트의 생각함은 감정, 감각 등 다양한 분야를 총망라한다. 그런데 이 의식들은 끊임없이 변한다.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사람은 계속 생각하니까.

 

우리는 항상 생각하고 계속 변화한다. 그래서 생각함 그 자체도 쉼 없이 변한다. 무상하다. 이것이 고정 불변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양철학과 불교철학은 계속 논증 과정을 통해 대립한다.

 

그런데 무아 그런 나는 없다에서 이 모든 과정이 나를 찾는 과정이라고 한다.

 

나를 찾는 과정은 실은 나를 내려놓은 과정이다. 나의 존재를 내려놓는다고 함은 구체적으로는 내 몸과 마음을 내려놓는다는 말이겠다. p137

 

나를 내려놓고 헛된 욕망과 집착을 버리는 것, 그것이 고뇌로부터 해방되는 길이라고 한다. 무아의 진리를 실천해 스스로를 해방하는 것이 해탈이고 자유로의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무아 그런 나는 없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불행하지 않은 그냥 담담한 상태를 행복으로 받아들이라고. 그래야만 성공이나 쾌락,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무아 그런 나는 없다의 작가는 '불행으로부터 자유롭다'라는 의미는, 적극적으로 무엇인가 충만해야 행복을 느끼는 것보다 불교적 행복을 따라야 행복할 것이라고 본다. 또한 그래야 불행한 사람의 수가 줄어들 것이라고도 하였다.

 

불행하지 않은 상태가 곧, 행복으로 보고 있다. 일상의 편안함이나 안일함, 소소함을 행복으로 보라는 말인 것 같다.

 

무아 그런 나는 없다를 읽으며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고 느꼈다. 불교적 행복으로, 무사안일한 하루였다면 꽤 괜찮은 행복한 하루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오늘 하루 비가 오고 길도 미끄러웠지만 불행하지는 않았으므로 불교적 행복에 의하면 오늘 나는 행복한 하루를 보낸 것이다. 그렇게 믿으니 정말 불행할 일이 없을 것 같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게 행복이라고 느낀다면 정말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수는 현저히 감소할 것이며,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을 어렵게만 바라봤는데 이 책을 통해, 불교철학 붓다의 가르침을 조금은 이해한 듯싶다. 작가가 쉽게 서술한 것도 있지만 책은 얇아야 가볍게 읽힌다며 간략하게 집필한 작가의 센스도 엿보인다.

 

무아 그런 나는 없다로 자신을 바라보고 성찰하는 시간을 갖고, 행복에 대해 사유해 보는 시간을 가졌길 바란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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