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틱낫한의 일기 - 나를 만나는 길 1962-1966
틱낫한 지음, 권선아 옮김 / 김영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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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틱낫한의 일기를 받았다.

김영사 서포터즈를 하면서 책을 고르면 그 책을 보내준다. 그리고 나는 그 책을 읽고 느낀 바를 포스팅한다. 내가 고른 책은 젊은 틱낫한의 일기다.

 

불교신자가 아닌데..

종교는 어렸을 적에 크리스마스에 취해 사람들과 어울리고 맛있는 것을 먹고 노래와 춤을 추며 그날을 기리는 게 흥겨워서 교회를 잠깐 다닌 것 말곤 없는데, 왜 나는 이 책을 고른 것일까?

 

시댁에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결혼하고 얼마 안 돼서였다. 이제는 김씨 집안사람이니 교회나 그런 곳을 가면 안 된다고.. 물론 무교였기 때문에 흔쾌히 그러겠다고 하였다.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 보니 우리 집은 가톨릭으로 모두 세레를 받았다. 그걸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던 것을 순진하게 난 무교니 그런 곳에 갈 일 없다 싶어 안 그러겠다고 순순히 대답했던 것이다. 기싸움에서 진 건가? 아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의 종교는 그 누구에 의해서든 결정될 수 없다. 오죽하면 집안 모두가 가톨릭 신자인데 나만 무교일까.

 

변한 것은 나이가 먹고 나니 불교든 기독교든 천주교든 나에게 그게 다 똑같이 하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에 대해 사유하고 싶어 젊은 틱낫한의 일기를 고른 이유다.

 

이 책을 고른 이유는 그러한데, 그래서 종교의 통합적인 이야기와 성찰 등을 기대하고 읽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젊은 틱낫한 승려는 내게 종교의 믿음보다 본인 자아에 대한 성찰과 당시 본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국가의 상황, 정치를 아우르는 시대상을 꼬집고 비판하고 있다. 승려이고 불교신자임에도 정치적 성향을 드러낸 것에 대해 글을 쓰고 집필을 하고 그것을 책으로 엮은 것에 대해 탄압을 받았다.

 

그런 일련의 이야기들의 지극히 한 인간으로서 담담하게 일기 형식으로 담아내고 있다.

 

나라면 저 상황에서 그럴 수 있겠는가?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불교의 승려로써 명성을 얻고 국민의 지대한 관심을 받을 것인데, 과연 나라면 정치적 의사를 내비쳐 탄압의 대상을 자초할 수 있겠냔 말이다.

 

젊은 틱낫한 승려는 한다. 다른 젊은 승려와 불자들을 모아 사원을 차리고 그곳에서 명상과 기도를 올리며 국민들을 위해 앞장서서 힘없는 자들과 함께 한다.

 

처음부터 그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불교 지도층은 보수적이어서 틱낫한 승려의 글(인본주의)을 인정하지 않았다. 지도층을 이해시키려 하였지만 그들은 입을 굳게 다물고 지금 베트남의 상황에 눈을 감았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구하고 도움을 받고 노통을 하여 돈을 버는 등으로 사원을 짓게 된다. 그 사원이 프엉보이다.

 

'프엉''향기로운' '드문' '소중한'이란 뜻이고, '보이'는 고대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던 '종려나무 잎'을 뜻한다. <젊은 틱낫한의 일기> 중에서

 

그 프엉보이를 짓기 위해 땅을 사고 계약서에 서명한 것을 두고 부동산을 소유하였다고 공산주의자들에게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틱낫한 승려의 핍박과 싸움의 시작이었다.

나는 베트남의 역사적 사실을 잘 알지 못하여 처음에는 젊은 틱낫한의 일기를 읽으면서 내용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책의 중반을 지나 말미에 이르니 왜 틱낫한 승려는 반전평화운동을 벌일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갔다. 종교인임에도 독재정부에 맞서 싸워 망명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안타까웠다.

 

미국으로 건너가 친구를 사귀며 함께 숙식을 해결하는 모습은 여타 다른 유학생과 같았다. 스티브와 같이 지내며 서로의 인생관 등, 입맛과 취향도 젖어들어 스티브는 꼭 베트남에 방문하여 프엉보이에 가보고자 하였다. 미국 생활에 염증을 느낀 스티브는 틱낫한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 베트남의 프엉보이를 같이 그리워하고 있었다.

 

젊은 틱낫한의 일기에서 스티브는 결국 베트남을 가게 되는지 가지 못하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틱낫한 승려는 그가 프엉보이에 오지 않길 바랐다. 그 부분이 적혀 있는데 베트남의 독재 정권, 전쟁으로 불안한 상황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본인이 그렸던 프엉보이는 예전의 깨끗하고 조용한 프엉보이가 아닌지라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추억 속의 프엉보이로 간직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었을는지도..

 

미국으로 건너갔던 틱낫한 승려는 그곳에서 본인의 조국을 위해 열심히 교리를 전파하였다. 현 베트남의 상황과 외국에 이 참상을 알리고 도움을 받고자 노력하였다.

 

한 번은 뜻을 관철시키고자 단식을 하는데 단식 장소를 제공받고자 하였으나 역시 미국은 미국이었다. 하루 대관료는 얼마임을 알리며 그것마저도 순탄치 않음을 보여준다.

 

우여곡절 끝에 단식을 하게 되고 그 곁을 조용히 지켜주는 스티브가 눈에 그려졌다. 외국의 승려 친구를 위해 세심히 배려해 주는 모습에서 우정 이상의 존경심 등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름답게 비쳤다.

 

한 일화이다.

틱낫한 승려가 미국에 있을 때, 꼬마가 물어왔다.

"불자들은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나요?"

"그럼, 우리나라에서는 불자들이 네 번째 달의 보름날에 크리스마스를 축하한단다. 우리는 그날을 '붓다마스'라고 불러"

 

이 이야기를 보면서 내가 처음 이 책을 읽기 전에 생각했던, 그 부분이 해소된 듯한 느낌이었다. '종교는 여러 가지의 이름으로 불리지만 결국 하나의 신으로 합치된다 것' 말이다.

 

나는 세상에 유일신이 있다고 믿는다. 종교나 계파는 중요치 않다. 결국 태초의 신은 하나라는 것. 그리고 사람들이 각기 원하는 이름으로 명명하여 부른다는 것이라고 믿는다. 인간을 신을 믿고 따른다면 그 신도 우리를 보살펴주고 돌봐줄 것이라고 믿는다.

 

행운도 그렇게 흘러나오지 않을까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무교다. 그러나 신은 있다고 믿는다. 부처님이건 하나님이건 알라신이건. 명칭은 알아서들 생각하시고.

 

그래서 나는 선행을 베풀면 그 복이, 행운이 돌아오게 된다고 믿는다. 억지고 이기고 살 필요 없이 조금 손해 보듯 살아가는 것도 이런 이유 탓이리라. 다 내 자식들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선행까진 아니더라도 악행은 절대 저지르지 않는다.

 

아이들에게도 같은 교육방침을 가르친다.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공부해서 남 주고. 남과 더불어 사는 게 좋고, 남을 배려하며 살면 가장 좋고 말이다.

 

배워서 남 주자에는 이 틱낫한 승려와 같이 정당한 일에 앞장서는 자세도 포함되어 있다.

 

서로를 이해하며 산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을 결혼이란 제도로 알게 되었다. 다름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게 그 사람이 틀렸다가 아님을 아는데 본인 생각을 요구하고 자기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니 관계는 틀어진다.

 

그러나 한 나라의 독재 정권과는 이야기가 다르다. 이건 차이가 아니라 옳고 그름이다. 바로잡아야 한다. 국민들이 핍박받고 피해자가 된다. 그 고리를 하루빨리 끊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다음 세대에까지 영향이 갈 수밖에 없다. 그것을 바로잡는 데는 종교인이건 학생이건 편가르기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것을 틱낫한 승려가 한 것이다.

 

틱낫한 승려가 한 말 중에 이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부처님은 어디에나 있다고. 절에 모시니 절간에 들어앉아 있는 분이 부처님일 수도 있겠지만, 진정한 부처님은 우리 마음속에 있고 우리와 함께 땀을 흘리고 같이 아파하고 고통받는 이가 부처라고.

 

오늘은 세계에서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틱낫한 승려님에 대해 읽어 보았다. 그분은 2022년 입적하였지만 그 정신은 아직도 살아있음을 느껴본 소중한 시간이었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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