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지나간 세계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부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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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다 지로는 현실과 환상의 장면을 섞어 한 남자의 인생을 이야기 한다. 이번에 아사다 지로가 선택한 것은 지하철이다. 지하철은 더 많은 사람들을 더 빨리 더 멀리까지 실어 보낸다. 목적지를 향해 출발한 지하철은 역마다 정차해 사람을 태우고 누군가는 내리는 과정을 반복한다. 종착역에 도착한 후 다시 출발과 도착의 과정을 무한 반복한다. 다케와키의 삶도 지하철처럼 출퇴근을 하는 반복의 연속이었다. 정년퇴직 송별회는 그러한 반복의 끝을 알리는 신호다. 송별회 이후 오랫동안 출퇴근을 도왔던 지하철 안에서 쓰러진 다케와키는 의식을 잃고 병원에 실려 간다. 반복의 끝은 멈춤이라고 말하는 듯 다케와키의 일상도 멈춘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다케와키를 입사 동기 홋타는 짧은 시간 들여다보고 돌아간다. 어린 시절 보호시설에서 함께 자란 나가야마는 친구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계속 찾아오고, 다케와키를 아버지라 생각하며 사랑하는 사위 다케시는 슬퍼할 아내를 위해 퇴근 후 다케와키를 지킨다. 40년을 함께 한 아내 세스카와 세 아이의 엄마가 되는 딸 아카네는 남편과 아버지가 빨리 의식을 되찾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어린 나이에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 하루야는 자신과 함께 가려는 아버지를 더 있다 나중에 오라는 말로 남겨두고 떠난다. 집중치료실 간호사 고지마는 20년 동안 지하철에서 마주친 다케와키가 의식이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지켜본다. 이들의 염원대로 다케와키는 깨어날 수 있을까?

 

당신이 살기 위해서라면 나를 버려도 괜찮아. 나는 남자니까 당신 없이 살아갈 수 있어. 하지만 몇 가지 소원을 들어줘. 서른다섯 살의 아름다운 당신과 지하철을 타고 싶어. 예순 살의 더 아름다운 당신과 아름다운 고향의 불빛을 바라보면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고 싶어. 순결한 엄마가 성스러운 아기를 낳은 그날 밤을.’(415페이지)

 

의식이 없는 다케와키는 몸은 병원에 있는 상태로 꿈과 현실이 혼동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눈 내리는 밤, ‘이라는 뜻의 이름을 한 마담 즈네와 함께 프랑스 레스토랑을 찾아 좋아하는 메뉴로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돌아온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자신의 기억 속 해변에서 시즈카를 만나 함께 음료수를 나눠 마시고 식사를 한다. 집중치료실 옆 침대에 누워있는 사카키바라가 다케와키에게 말을 걸어오고, 그의 추레한 차림과 거침없는 말투에 거부감을 느끼지만 함께 병원을 나가 대중목욕탕을 간다. 포장마차에서 좋아하는 안주로 정종을 나눠 마시고 병원으로 돌아온다. 더 이상 삶의 미련이 남지 않았던 사카키바라는 병원으로 돌아와 임종을 맞는다. 가족들이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임종을 지킬 사람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다케와키의 사위 다케시가 마지막까지 사카키바라의 옆을 지켜준다. 사카키바라를 배웅하러 간 지하철에서 다케와키는 사카키바라의 첫사랑 미네코를 만나 함께 지하철을 탄다. 자신이 버린 첫 사랑 후즈키가 찾아오지만 이야기는 나누지 못한 채 후즈키는 사라진다. 지하철을 탄 열다섯 살의 미네코와 아기의 모습을 바라보고, 자신의 아기 때 기억을 되찾는다. 세상을 먼저 떠난 아들 하루야를 만나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엄마와 동생과 조카들 곁에서 더 있다가 오라는 말을 한 후 이별한다. 노년을 시작으로 다케와키의 시작점인 버려지는 순간까지 그는 자신이 너무나도 궁금하고 만나고 싶었던 그 사람과 함께 한다. 여러 번의 만남을 통해 왜 자신을 버릴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게 되고, 자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받은 행복한 아이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버려졌다는 것만으로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불행할 것이라고 단정 짖고 기억을 지워버리면서 살았던 다케와키는 그 기억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된다.

 

내가 스물이 되면 당신은 서른다섯. 내가 스물다섯이 되면 당신은 마흔. -중략- 내가 마흔이 되면 당신은 쉰다섯. 내가 예순다섯이 되면 당신은 여든.’(409페이지)

 

열다섯 소녀는 엄마가 되고, 자신과 아이를 살리기 위한 방법을 선택한다. 공습으로 모든 것을 잃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운 채 홀로 세상을 살아가야 했던 소녀에게 엄마로 사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고 절망적이었다.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순리다. 하지만 그 순리를 따르지 않았다 해도 그 상황과 마음을 알 수 없기에 내 잣대로 비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처참한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했다. 전쟁 후 복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급성장한 사회는 전쟁의 처참함과 빈곤함을 빠르게 지워나갔다. 미네코와 사카키바라는 전쟁으로 빈곤한 시대에 빈곤하게 살았다. 다케와키와 나가야마는 풍족한 시대에 빈곤하게 살았다. 그 시대를 살아가고 버티기 위해 풍족한 시대를 풍족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더 힘든 삶을 살았을 것이다. 버티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쉼 없이 일을 했던 다케와키는 일의 끝인 정년 송별회를 끝으로 의식을 내려놓는다. 비로소 쉼의 시간을 갖게 된 그는 생과 사의 선택의 순간 생의 의지를 내려놓으려 한다. 그 순간 찾아온 사람들과의 만남은 그에게 생의 의지를 깨워준다.

 

사람은 사람에게 상처받기도 하지만 사람으로 인해 치유 받는 것이 더 크다. 다케와키는 자신의 삶이 불행한 삶이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잘 살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한 번도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 적 없던 다케와키는 훌륭하게 잘 살았다’, ‘힘들었겠다’, ‘살 권리등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를 깨닫게 된다. 아내 세쓰코와 노인 사카키바라는 그가 훌륭한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 버려져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보호시설에서 자라야 했던 다케와키의 유년은 불행하고 힘들었지만, 미래를 향해 적극적으로 나아갔기에 훌륭한 삶이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상태로 무엇인가를 이룬다는 것도 그 또한 어려운 일이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이룬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불우한 환경에서 비뚤어지지 않고 잘 자라준 다케와키에게 나도 훌륭하게 잘 컸다고 말해주고 싶다.

 

겨울이 지나간 세계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전쟁 당시와 전쟁 후의 일본의 시대상과 죽음을 받아들이고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아이를 낳아 기른다. 모든 부모가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우는 것은 아니다. 다케와키의 부모는 아이를 버렸고, 다케시는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고, 어머니는 무책임하게 아이를 돌보지 않았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두 아이의 유년 시절은 불행했고, 성장한 후까지 영향을 미쳤다. 다케시는 나가야마와 아내의 부모에게서 받지 못했던 사랑을 받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되돌려주는 어른으로 성장해간다. 나이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사람을 통해, 상황을 통해, 경험을 통해서 계속 더 나은 나로 성장한다. 겨울이 지나간 세계는 어른들의 성장이야기이다.

 

네게는 살아갈 권리가 있어.”(419페이지)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살아갈 권리와 의무가 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고아가 되어 홀로 살아가야 할지라도 세상에 태어났으니 스스로의 생명에 대한 책임이 있다. 생명존중과 존재의 권리와 더불어 의무도 잊지 않기를.

 

 

발췌글

9

땅거미가 내리자 눈이 찾아왔다.(첫 문장)

 

55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건 이상하다. 아마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이에 모든 걸 잊어버린 게 아닐까?

 

71

나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는 잘 알고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와 장소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눈이 핑핑 도는 고도 경제 성장 속에서, 고생이란 말은 이미 죽은 말이 되었다. 전쟁은 없었다. 기회는 공평했다. 숙명적인 어려움에는 최대한 원조가 있었다. 그런 시대에 고생은 비유적인 표현이거나 노력이 부족했다는 뜻이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행복한 시대를 살아온 우리는 가혹한 역사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다.

 

72~73

인간에게는 여러 욕망이 있다. 더구나 욕망의 양은 똑같지 않다. 그래서 야심이 있는데 부지런하지 않다든지 잠을 적게 자는 대신에 대식가라든지 돈을 빌려서라도 도박을 한다든지 한다. 그런 욕망을 수치화해서 그래프로 나타낼 수 있다면 형태가 크고 아름다울수록 대단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바로 인간의 그릇이다. 내 그릇은 예쁘장하게 생겼지만,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게 중요한 점인데, 개인적인 욕망의 총량은 일정해서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이와 함께 형태가 변한다.

 

88

출생의 열등감을 없애지 않으면 남들처럼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언젠가부터 어린 시절의 기억에 뚜껑을 덮었다.

 

94~95

적당한 화제가 없을 때, 또는 예민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는 음식 이야기가 최고다. 하지만 내가 젊었던 시절에는 그것도 상대의 나이에 따라 배려할 필요가 있었다. 고생을 모르는 애송이라고 무시당할지도 모르고, 상대가 고생담이라도 늘어놓으려고 하면 즉시 분위기가 썰렁해지니까. -중략- 1951년 출생인 나는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된 최초의 세대였다.

 

127

인간은 싫은 일을 금방 잊어버리죠.”

 

192

따분함은 참 좋다. 삶에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들을 생각하는 시간. 오직 사고와 상상만 하는 비생산적인 시간. 옛날 인류는 풍요로운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며 살다가 우아하게 눈을 감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런 일들은 나태함이 되고 비생산적인 행위가 되었으며, 사람들은 자유로운 사고와 상상을 봉쇄하며 살게 되었다. 아무리 수명이 늘어났다고 해도 그런 인생은 너무나, 그런 죽음은 너무나 빈곤하지 않은가. 육체가 자유를 잃어버리자 모든 기억이 시간 순서를 잃어버리고 어제 일어난 일처럼 느껴진다. 과거를 되돌아볼 여유가 부족했기 때문으로, 인생의 모든 귀중한 일이 앨범에 정리하지 않은 사진처럼, 또는 컴퓨터에 저장되어 영원히 햇빛을 보지 못하는 자료처럼 언제 일어난 사건인지도 모른 채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몰랐던 따분함이라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209

내 뇌의 밑바닥에는 이렇게 수많은 기억이, 열릴 일이 없는 창고 안에 있는 물건처럼 제자리를 잡고 있는 것인가.

 

225

세상에는 잊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지.”

 

231

잃어버린 풍경은 기억에 머물지 않는다. 옛날에는 어땠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올릴 수 없다. 다만 지금과는 다른 풍경이 있었을 거라고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다.

 

235

나는 쏟아지는 함박눈을 올려다보았다. 희미한 가로등의 불빛 속에서 태어나 도로에 떨어지는 순간 한 방울의 물로 변하는 덧없는 눈이었다.

 

237

세상의 굴레가 없다는 건 고생의 절반은 없다는 뜻이니까.

 

241

죽음은 허무한 일임이 분명하지만, 그곳에 이르는 도중에 시간에서 해방된다고 나는 믿고 있다. 겨우 몇 분일지라도, 죽는 사람에게는 수십 년이나 또 하나의 인생이라고 할 만큼, 아니 영원으로 여겨질 만큼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고. 애초에 시간이란 것은 너무나 모호하지 않은가. 소년의 하루와 노인의 하루가 같을 리가 없다. 객관적으로는 똑같아도 주관적으로는 각각 다르다. 그렇다면 죽음을 앞두고 육체가 쇠약해진 순간에는 각각의 정신, 다시 말해 주관적인 시간이 새로이 나타나고 사회가 정한 객관적인 시간은 무의미해지는 게 아닐까?

 

258~259

당장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다. 사람과 헤어진 뒤의 기분은 그런 법이다. 상대가 애인이든 친구든, 한순간의 이별이든 영원한 작별이든, 하나의 세계를 잃어버리는 것이 분명하다. 마음속에 텅 빈 공간이 생기고, 그때 자신의 처지에 상관없이 마치 무인도에서 눈을 뜬 표류자처럼 때와 장소를 잃어버린다. 지금까지 인생에서 그런 경험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321

배워서 얻는 지식과 달리 따뜻함이나 자애로움은 본래 부모로부터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가 없는 아이에게는 누가 남들만큼의 따뜻함이나 자애로움을 줄까?

 

372

무엇을 해도 된다라고 생각하면 풍요로운 시간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생각하면 빈곤한 시간이다. 노후는 이 두 가지가 상반되는 게 아니라 똑같은 뜻이 되는 시간이다.

 

398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하는 존재. 내가 나누어 준 생명. 흐르고 또 흘러서 행복의 항구에 도착했으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자신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행동을 비난하는 사람은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사는 자들이리라.

 

406

옛날 사람들은 다들 개성이 있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 빼빼 마르기는 했지만 각각의 얼굴에 각각의 인생이 배어 있었다. 물론 그들이 짊어진 인생은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나고 자란 나 같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지만. 풍요로운 사회가 인간에게서 개성을 빼앗는 건 아닐까?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모르겠다.

 

408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모두 불행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기 일만으로도 벅차다고 변명을 하면서.

 

410

고아에게 최대의 핸디캡은 사랑의 결여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인생의 핵심이나 중심이 될 수 있는 것, 모든 행위에 도덕 기준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이럴 때 아버지라면 어떻게 할까, 어머니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단순한 사고방식을 우리는 가질 수 없었다.

 

416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 그러니까 당신도 뒤돌아보지 마. 누가 뭐라고 하든 우리에게는 이게 최선의 선택이니까. 나도 당신도 행복해져야 해. 누가 봐도 최악의 선택이지만 우리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던 이 어찌할 수 없는 밤을, 적어도 우리만의 성스러운 밤으로 만들기 위해.

 

417

버린 것이 아니다. 숨겨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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