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와 모라
김선재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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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산에서 자란다는 돌배나무의 라. 그게 내 이름이다.(11페이지)

 

곤륜산의 돌배나무 라는 이름의 노라와 가지런한 그물이라는 이름의 모라는 엄마와 아버지의 재혼으로 만나 가족이 되었다.

 

노라의 아빠는 중국집 개업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고로 돌아가셨다. 아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눈을 감고 다리 부분이 잘린 사진 한 장 뿐. 노라는 사진 속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진짜 아빠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 한다. 눈을 뜬 아빠의 모습을.

어느 날 엄마는 비디오를 틀어주고 밖으로 나간 후 사라졌다. 홀로 남은 모라는 어둠 속에서 엄마를 기다리지만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고, 일을 나갔다 오랜만에 돌아온 아빠는 모라를 혼자 키울 수 없어 작은 아버지에게 맡기고 일을 하러 떠난다.

 

어린 시절 노라는 아빠가, 모라는 엄마가 사라졌다. 노라에게 남은 건 다이어트를 한다는 이유로 고구마를 먹는 수다스러운 엄마뿐이다. 모라에게 남은 건 일을 하러 떠난 아빠뿐이지만, 아빠와 살 수는 없다. 노라와 모라는 엄마와 아빠의 재혼으로 자매가 되었지만, 모라 아빠의 인쇄소가 망하면서 부부는 이혼을 하게 되고, 노라와 모라는 헤어지게 된다. 함께 살아가는 동안에도 살가운 사이의 자매는 아니었던 둘은 부모의 이혼을 짐작하고 헤어질 준비를 했었다. 노라의 엄마는 노라만을 책임지고, 모라는 일하러 가는 아빠와도 헤어져 어린 시절 살았던 작은 할아버지 집으로 돌아간다. 할아버지가 치매로 모라를 돌볼 수 없게 되자 모라는 혼자 고아처럼 삶을 책임지고 살아간다. 16년 후 갑자기 들려온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집을 나선 모라는 노라에게 아버지의 부고를 알린다. 당황했지만 장례식에 참석하겠다 대답한 노라는 모라에게 온다. 20년 만에 다시 보게 된 둘은 밥을 먹고 화장장에 들러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노라는 모라에게 오래전 보내지는 못했지만 편지를 썼었다고 말한다. 왜라고 묻는 모라에게 노라는 하나였던 때가 있으니까’(187페이지)라 대답한다. 노라는 모라를 생각했었다고 말한다. 둘은 다시 헤어져 버스를 타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노라와 모라는 타인이었다가 가족이 되었고, 가족이었다가 다시 타인이 되었다. 하지만 처음 타인이었던 것과 후에 헤어져 타인이 된 둘의 관계에서 타인의 의미와 거리는 달라진다. 전혀 모르던 남이었던 노라와 모라는 엄마와 아빠의 재혼으로 가족이 되었고, 서로가 친밀감과 강렬한 공감을 느끼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벽으로 적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살았다. 이렇게 살던 둘은 다시 타인이 되었지만 이 때 둘에게 타인의 의미는 처음과 다르다. 남으로 돌아갔지만 서로에 대한 기억과 조금은 진득한 감정으로 얽힌 타인이다. 그렇기에 노라는 모라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거절하지 않고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떠났던 것이다. 둘이지만 또 하나의 존재, 하나의 존재이지만 서로 섞일 수 없는 두 존재. 노라와 모라는 모순적인 존재이다. 가깝지만 멀고, 멀지만 또 가까운 둘의 관계는 두 사람의 존재처럼 모순적이고 잔잔하면서 외롭고 슬픈 관계다. 책을 읽으면서 잔잔하게 연결되는 글과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가 뒤섞여 언뜻 정신없는 것 같기도 했지만 글은 정갈하고 정돈되어 노라와 모라의 이야기와 감정을 전달하고 있다.

부모의 죽음과 가출, 이혼 등 부모의 문제는 아이들의 인생과 정서에 큰 영향을 준다. 사람과 주변 상황에 무관심한 노라와 버려질 것이 두려워 상대방에게 맞추기만 하는 모라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 노라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자신이 우선인 노라의 엄마는 신을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으로 책을 읽는 동안 따뜻한 엄마의 느낌은 들지 않았다. 모라의 엄마는 가족을 버렸고, 모라의 아빠는 아이를 방치한 채 떠돌았다. 노라와 모라가 함께 한 7년의 시간은 짧지만 둘 각자에게 상처이면서 동시에 위안이 되어주었던 시간이었다. 노라가 모라이고, 모라가 노라이다. 이것이 이 책을 다 읽고 난 나의 생각이다.

 

발췌글

17

사실, 사실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는 게 내가 아는 사실이다. 말하지 않는 각자의 사실들이 있다. 털어놓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18

엄마는 사는 게 제일 무서운 거라고 했다. 결국 사람들이 온갖 별짓을 다 하는 건 결국 사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알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22

미워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의지로 움직여지는 건 아니었다.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33

웃고 떠들지만 아무도 자기 얘기를 하지 않는 사람들.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주로 가깝고도 먼 얘기를 한다. 이를테면 제철 미나리의 효능이나 맛에 대한 얘기.

 

47

너는 알잖아.

누군가 그렇게 말한다. 나는 귀를 막는다. 나는······듣는 사람이고 보는 사람이면서 말하지 않는 사람.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내 꿈에 내가 없는 이유다.

 

48

없는 걸 생각하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는 건 사는 데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가지지 못한 걸 탐하는 마음. 엄마는 그런 게 많은 사람이다.

 

54

20년 만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시간은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으로 변하거나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 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58

죽음에 순서가 없다는 생각. 그 죽음의 이유에 대한 짐작들이 점멸하는 전등처럼 하나하나 떠올랐다 빠르게 사라졌다. 그리고 역시·····오래 묵은 안부는, 모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남았다.

 

61

구원은 있어도 살고, 있어도 모르고, 없어도 삶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64

잘 가라거나 어서 오라거나. 내가 아는 세계는 이 두 문장 사이에 있다.

 

71

모든 말에 마음을 담는 것도 피곤한 일이겠지만 마음에 없는 말만 하며 사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피곤한 일일 텐데.

 

73

죽음은 언제나 눈을 감은 자의 사진을 보는 것과 같다. 보고 있지만 끝내 보이지 않는 것. 영영······알 수 없는 것.

 

77

오래된 맛. 그건 맛이라기보다 시간과 공간이 뒤섞인 향수에 가까운 거다.

 

80

지금 나에게는 들리고 모라에게는 들리지 않는 말들이 있다. 모라에게는 보이고 내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다시 만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로에게 묻지 않는 말들이 있다.

 

81

상상은 원래 경험 세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

 

89

뭘 모른다는 무구함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더는 순진과 무구가 면죄부가 될 수 없는 나이가 온다.

 

91

누굴 편하게 할 성격이 아닌 엄마는 자신만의 삶이 있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조차 자기화하는 경향이 강한 사람이다.

 

96

그건 의미라 아니라 어떤 이미지, 혹은 하나의 세계였다. 너무나 당연해서 한 번도 의심하거나 따져보지 않는 세계. 그 세계가 실은 진짜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면 그건 없는 세계가 될까.

 

100~101

언제부턴가 나는 이해한다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이 싫었다.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관심을 보이며 이해하려고 드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걸 알고 난 뒤로는 더욱 그랬다. 정말이지 내가 아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를 너무 쉽게 이해한 나머지 다소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건 이해가 아니라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자주 생각한다. 이해와 동정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쪽이 훨씬 대하기 편하다.

 

138

이상하게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머리가 뜨거워지고 숨소리가 커지는 말이 있다. 그 말이 내게 뭔가 견디기를 요구하거나 내 주제를 파악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리는 건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140

잊는다는 건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을 때 비로소 잊은 것이 된다.

 

145

기억은 종종 시간의 순서를 바꾸고 진짜와 가짜를 혼동하게 만들기도 한다. 오래된 기억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 있다. 조금만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그게 진짜일 리 없는 일이었다는 걸 알았을 텐데······.

 

170~171

연민에 빠지지 않는 것. 여기까지 나를 끌고 온 건 그거였다.

 

175

내가 아는 인간은 대개 연약하고 속을 알 수 없으면서 동시에 어리석고 사악한 면도 가진 자들이었다. 안 그런 사람이 없었다.

 

186

묻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마음이 있듯이, 이유를 알고 싶은 마음들이 있다. 나도 모르고 그들은 아는 마음과 나는 알고 그들은 모르는 마음. 그 사이에 우리가 있다. 이유를 묻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마음들. 그건 아주 오래되고 사적인, 비밀들이고 그 비밀들이 이야기를 만들고 덧붙이고, 이어갈 거다. 내가 묻고, 또 묻는 이유다.

 

187

지금은 사라진 마음들, 사람들. 굳이 그것들을 떠올릴 생각은 없다. 다만, 그런 시간을 지나왔다는 생각을 하면 가끔 길고 깊은 숨을 쉬게 된다. 깊은 바닥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거대한 포유류처럼, 살고 싶어진다.

 

192

같은 종자를 심어도 어떤 건 웃자라고 어떤 건 착과가 안 되고 또 어떤 경우는 돌연변이가 생기기도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 매번 처음 보는 심정으로 살필 수밖에. ······농사뿐만 아니라 사는 게 다 그럽디다. 이 나이가 되도록 어째 익숙한 게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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