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하는 여자들
주진숙.이순진 지음, (사)여성영화인모임 기획 / 사계절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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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하는 여자들은 아이와 함께 읽고 싶은 책이다. 작년부터 아이는 영화인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분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난 어떤 도움이나 조언을 해줄 수도 없다. 영화는 보고 즐기는 단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아주 평범한 관객일 뿐인 내가 영화의 영자도 모르는 상태로 어떤 조언을 할 수 있겠는가? 아이가 영화인의 꿈을 꾼다면 한국에서 영화하는 여성들의 일원이 되어야 하기에 이 이야기를 나도 읽고 딸에게도 읽히고 싶었다. 이 책이 영화인을 꿈꾸는 딸을 바라보는 나의 불안한 마음과 막연하게 꿈만 꾸고 있었을 딸에게 길잡이가 되어주기를 희망해본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고 10년 단위의 시기를 나눠 총 20명의 여성 영화인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실었다.

1부는 소외의 벽을 넘은 인물들의 인터뷰이다. 1990년대 여성 영화인이 많지 않았던 시대에 여성이 진출할 수 있는 영역은 제작, 시나리오, 편집, 스크립터 등 몇몇 분야로 한정되어 있었다. 촬영이나 조명, 사운드 분야에 여성이 발을 들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영화 현장에서 소외되었던 여성들이 그런 편견의 벽을 넘어 당당하게 전문적인 영화인으로 성장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명필름 심재명대표, 인디페이스 안정숙 관장, 임순례 감독, 박곡지 편집감독, 올댓시네마 채윤희대표, 영화배우 전도연이 있다.

2부는 2000년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그동안 영화계는 도제시스템을 통해 사수에게 기술과 노하우를 전수 받았던 시스템이었다. 도제시스템은 1990년대부터 무너지기 시작했지만 그 흐름이 확실해진 건 2000년대 이후 표준근로계약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부터이다. 이때부터 개인의 역량이 중요한 평가기준으로 자리 잡는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여성 영화인으로는 영화배우 문소리, 외유내강 강혜정대표, 미술감독 류성희, 음향 편집기사 최은아, 조명·촬영 감독 남진아, 편집감독 신민경, 앤드크레딧 박혜경대표, 영화 프로듀서 김영덕이 있다.

3부는 단단한 자기중심과 새로운 감수성을 갖춘 인물들이 등장한다. 2010년대 이후의 여성영화인은 영화사 아토 제정주대표, 촬영감독 엄혜정, 다큐멘터리 감독 김일란, 영화감독 윤가은, 영화감독 전고운, 영화 배우 천우희다.


 20명의 여성 영화인 중 내가 이름을 들어보거나 얼굴이나 작품을 본적이 있는 사람은 심재명, 임순례, 전도연, 문소리, 천우희 이렇게 5명뿐이다. 그것도 3명이 배우이고 배우가 아닌 사람은 단 2명 만 알고 있다. 여성 영화인들이 전면에 드러나서 활동하는 문화가 아니었거나, 내가 영화 문외한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후자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20명의 영화인 모두 한국 영화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이고 그 분야에서 인정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촬영감독 엄혜정은 카메라는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카메라는 성별을 가리지 않지만 영화 현장은 아직도 성별을 가린다.

동일한 출발선에 서는 게 아니라 뒤에서 출발해서 쫓아가야 하는 구조예요. 그래서 제가 커리어를 사다리에 비유해요. 높이가 2미터 정도면 까치발을 하고 팔을 뻗어서 손이 닿을 수 있는 길이요. 남자들에게 주어지는 사다리 간격이 2미터씩이라면, 여자들에게 주어지는 사다리 간격은 3미터씩이라고 볼 수 있어요. 남자들이 한 칸 한 칸 올라갈 때, 여자들은 한 칸을 간신히 , 운좋게, 잡고 올라가요. 그 다음 칸은 올라가기가 쉽지 않죠. 때로는 잡고 올라갈 그 다음 칸이 없을 때도 있어요. 저 같은 경우는 한 칸 잡고, 그 다음 칸이 생길 때까지 놓지 않고 버텼죠.”(촬영감독 엄혜정, 306페이지)

 엄혜정 촬영 감독의 말이 영화 현장에서의 여성 영화인의 현실일 것이다. 여성 영화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 중 하나가 운이 좋았죠라는 말이었다. 기회는 준비된 사람만이 잡을 수 있다. 모두 버티면서 준비했기 때문에 기회가 왔을 때 잡은 건데 왜 자꾸 운이 좋았다고 할까 의문이 들었는데 이 글을 읽고 왜 그런 말들을 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됐다. 실력이 있어도 기회가 오지 않으면 여성이 영화 현장에서 자리를 잡는다는 건 쉽지 않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다음 칸이 생길 때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성은 실수하면 개인의 실수이지만, 여성의 실수는 대표성을 띠게 된다’(310~311페이지)는 촬영감독 엄혜정의 말처럼 과거에는 더 심했고 아직도 이런 인식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영화 현장에서 성별을 나누지 않고, 사람과 사람으로 동등한 관계로 나아갈 때 우리 영화 현장도 더 크게 발전할 것이라 생각한다.

 

 ‘제정주대표를 알게 되어 행복하다. 솔직히 처음에는 솔직한 사람 아니라 생각했다. 1000만 넘고 블록버스터 급 영화 찍으면 좋은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약간은 삐딱한 시선으로 인터뷰를 읽어 나가면서 딸과 같은 제작자가 될거야의 모습에 호감이 갔고 무모할 정도로 밀어붙이는 추진력에 감탄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영화 공부를 시작하고 자기 소신 대로 추진하는 모습도 멋졌지만, 새로운 인재를 찾아내고 발굴하려는 마인드에 더 반했다. 창작자가 되어 이야기의 원형을 망치지 않으면서 좀 더 효율적이고 경제적이고 건강한 그림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수련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라 할 때 앞으로 이 분이 만드는 영화나 지원하는 영화는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딸에게도 이 분 강력하게 추천하며 인터뷰 꼭 읽어보라고 해야겠다.


 20명보다 더 앞선 여성 영화인들이 있다. 이해윤과 이경자이다. 이들이 영화 일을 시작한 1950년대 후반 한국 영화는 전후의 폐허 위에 놓여 있었다. 이해윤과 이경자는 최초의 여성 영화인이자, 한국영화의 산증인이다. 최초의 여성 영화인 모임인 영희회를 만들었고, 그 뒤를 이어 다음 세대인 심재명, 채윤희, 그리고 150여 명의 여성 영화인들이 여성영화인모임을 만든다. 2001올해의 여성영화인상공로상 부문의 수상자로 최초의 여성 편집기사 김영희와 함께 이해윤을 선정했다. 이분들의 노력으로 여성 영화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전문성을 쌓을 수 있었고, 그로인해 2000년대와 2010년대를 살아가는 후배들이 더 좋은 조건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틀이 만들어졌다.


 아이가 영화제작자가 되겠다는 꿈을 계속 가지고 갈 것인지, 중도에 다른 꿈을 갖게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인으로 살겠다고 결심했을 때 지금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한 사람의 영화인으로 대우받기를 바란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영화 현장에서 여성 영화인의 가치를 높여주었고, 지금도 높이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감사하다. 이들 모두가 위대한 영화인들이다.

책을 읽고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인터뷰 대상이 성공한 여성 영화인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이다. 잘못 읽힌다면 위인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영화 현장에 입문하거나 성장 중인 여성 영화인에 대한 이야기가 인터뷰 내용에 간접적으로 들어가기는 했지만 당사자의 말이 아니라 아쉬웠다. 이들의 이야기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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