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와 광인
사이먼 윈체스터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근래 들어 이 책처럼 몰입하여 단번에 읽어내려간 책이 없다.
책 제목이 그래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다 읽고 난 지금 마음 속에 지난 이틀 동안 한바탕 광풍이 지나간 느낌이다.

인터넷 검색하다가 이 책을 알게 되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절판되어서 인터넷 서점이나 오프라인 서점에서 구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부산의 한 인터넷헌책방 사이트에서 발견하여 구할 수 있었다.

주문한 책을 받아든 순간, 표지가 눈길을 끌었다. 전체적으로 흐릿하고 어두운 바탕에 옅은 주황글씨로 Oxford English Dictionary이라고 쓰여진 글자와 겹쳐서 모자를 쓰고 수염이 덥수룩한 초로의 한 남자가 포갠 무릎 위에 사전을 올려놓은 채 뭔가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모습이었다. 그 남자의 강렬한 눈빛에 끌려 출퇴근길 지하철과 귀가한 뒤 집에서 이 책을 놓지 않았다. 한편의 탐정소설을 읽는 듯한 스릴도 맛보았다. 

이 책은 1872년 2월 17일 영국 런던의 빈민가 람베스의 새벽공기를 가르는 총성으로 시작된다. 방아쇠를 당긴 사람은 이 책의 두 주인공 중 하나인 윌리엄  체스터 마이너. 그는 '편집증 형태의 조발성(早發性) 치매증' 즉 일종의 정신분열증으로 누군가 자기를 해친다고 생각하여 줄줄이 딸린 자식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새벽일을 나선 가난한 공장노동자를 죽인 것이다.

마이너는 미국 예일대 출신의 촉망받는 의사이자 미군 장교였다. 그러나 어제까지도 같은 나라의 국민이었던 병사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미친 전쟁인 남북전쟁에 참전한다. 그리하여 탈영한 아일랜드 사병의 얼굴에 낙인을 찍은 후 충격을 받고 미쳐서 군을 제대한다.  그후 마이너는 병 치료차 영국으로 왔다가, 망상 중에 엉뚱한 사람을 죽이고 영국의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수용소에서 고통과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마이너가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찬에 자원봉사자 참여를 호소하는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 제임스 머리 교수의 호소문을 접하면서 둘의 인연이 맺어지게 된다. 당초 1857년 트렌치 대주교가 빅토리아시대 대영제국의 위상에 걸맞는 새 영어 사전을 편찬하자는 제안에 따라 언어학회가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편찬작업에 착수한다. 그런데 이 사전 편찬작업의 특징은 기존 영어사전이나 프랑스에서 펴낸 프랑스어 사전과는 달리 개인 혹은 소수 전문가가 표제어를 선택하고 의미설명을 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하여 영어로 쓴 책이나 잡지, 신문 등에서 각 단어가 처음 쓰인 용례를 찾는다는 방식이다. 요즘으로 치면 집단지성 혹은 위키피디어적 방식인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워낙 어려운 일이라 작업이 진척되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가운데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때 새롭게 사전 편찬 책임을 맡은 머리교수는 아주 독실하고 성실하며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영국은 물론 영어 문화권 사람들에게 그동안 출판된 모든 문서를 검토해서 사전에 수록될 어휘의 예문을 찾는 자원봉사자가 돼줄 것을 다시 한 번 촉구하는 호소문을 1879년 배포한다.

이리하여 사전 편찬에 책임자와 자원봉사자로 만난 두 사람은 편지로만 알고 지내다 10년 뒤 머리교수가 마이너의 수용소를 방문하여 개인적으로 알고 지낸 뒤 이후 20년 동안 정기적으로 만남을 지속해왔다. 마이너는 뛰어난 학자적 기질을 발휘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다른 자원봉사자들보다 훨씬 뛰어난 방법으로 사전 편찬작업에 이바지하게 된다. 수용소에 갇혀 있던 그에게 이 일은 자신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으며 게다가 의미있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유일한 작업이었다. 사전 편찬을 위한 인용문은 그에게 약이었고, 인용문 작성은 치료과정이었던 셈이다. 때로 정신병이 심해져 손을 놓을 때도 있었지만 그는 가장 헌신적인 자원봉사자였다. 둘의 교유기간 동안 머리교수는 조용히 그를 지켜보며 그에게 감사하고 때로는 그를 격려한다. 그들의 우정은 머리 교수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1915년 머리교수가 사망하고 1920년 마이너가 사망할 때까지도 사전 편찬작업은 끝나지 않았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1927년에야 완성되었다. 최초 트렌치 대주교의 제안으로부터 70여년, 그리고 머리교수가 착수한 지로부터 약 50년이 걸린 셈이다.

한 남자의 광기와 지식의 결정체인 사전 편찬이라는 도저히 어울릴 것같지 않은 상관관계,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그의 광기 때문에 혹은 덕분에 머리 교수의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찬작업은 보다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난 지금 비극적인 삶을 산 한 위대한 사내에게 연민과 동시에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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