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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의 즐거움
하성란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식사의 즐거움
하성란(현대문학/2010.2.16)
살갑게 애둘린 건 중년의 사랑만이 아니다. 19세였을 때, 이미 중년의 사랑만큼이나 묵직한 무게로 그 깊이 모를 사랑이 한번쯤 훑고 지나갈 수도 있는 것이리라.
짝짝이로 기억되어 버린 남자는 재경이를 사랑한다.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둔 그는 늘 새로운 가족을 꿈꾼다. 11년이라는 무게 동안 93.5메가헤르츠에 고정된 그는 재경이와의 재회를 꿈꾸지만 그것은 어쩌면 ‘초혼’처럼 현실에서는 공허한 자기만의 몸짓이 되고 말 뿐인 것이다.
남자에게 천형처럼 떨어진 ‘업둥이 콤플렉스’로 시달리는 남자는 실상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과 자존감을 찾기 위한 몸부림 사이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일종의 ‘자기 방어 기제’인 것이다.
청소년기 때 좋아했던 여자 재경은 부잣집 딸이라는 오명에 부담을 안고 죽어갔다. 그녀 역시 쌀집을 하면서 근근이 살아가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혼자 남게 된 남자가 사랑했던 여자 재경을 잊어버릴 때까지 걸린 기간은 11년. 그런 것도 같다. 쉽게 잊을 수 없을 것도 같다. 그녀에게 코드가 맞아버린 존재감은 93.5메가헤르츠라는 붙박이 사이클에 맞춰진 채 그렇게 무수한 시간만 잡아 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새로운 ‘가족’을 찾았다. 아니 찾았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늘 상상 속에 그리던 그곳을 그는 자기 집으로 오인했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진짜 식구라고 착각하기까지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거의 상처-트라우마-는 간혹 이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변모해 갈 수도 있다. 우리는 늘 이러한 개연성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비단 남자와 재경의 얘기뿐 아니라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는 누구나 이런 종류의 고뇌와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지 않았던가?
이제 우리는 다시 묻는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에 나왔던 그 터널처럼 우리는 늘 성장의 굴레 속에서 빠져나오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성장소설’이라고.
귀가 떨어져 나가 너덜너덜해진 포마이카 밥상을 던져 버리고 우리는 새롭고 아름다운 상을 마련해야 한다.남자가 그랬듯이. 그리고 그 상에 둘러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생각하면서 새롭고 다정한 식구들과 폭력 없고 사랑에 지치지도 않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남자는 비로소 어른이 되었지만 우리는 뭔가? 나이만 들어갔지 분명 어른이 되었다고, 성장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작가 하성란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통과한 빛의 마술사처럼 그것을 되묻고 있다. 참으로 교묘한 작가다.
남자는 긴 터널을 빠져나갔지만 우리는 뭔가? 아직도 헤매고 있지 않은가!
세상은 참으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우리는 늘 적응하기 힘들다. 사랑해야만 할 존재는 늘 재경처럼 사라져 버리고, 우리는 늘 ‘업둥이 콤플렉스’ 속에서 새로운 가족과 함께 ‘식사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주변에 ‘짝짝이’는 없나 살펴보아야 한다. 바퀴벌레 같은 존재들이 있을 때는 소독약을 뿌려서 박멸해야만 한다.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영원히 깨끗하고 안전하고 평온한 가정을 되찾아야 한다. 쌀집 딸이면 어떻고 바퀴벌레를 잡는 위생업을 하는 아버지를 두면 어떻고 가난하면 또 어떤가.가난이야 한갓 남루에 지나지 않다지 않은가! 왜 남자의 아버지 같은 폭력자를 만드는가. 자꾸만 귀가 떨어져 나가는 포마이카 밥상을 만들어 내는 이 사회에 향해 작가는 이런 탄력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19세는 어떠했는가? 지금의 19세에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작가는 조용히 되물으면서 돌려막기를 하지 말라고 하질 않는가.다시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