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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온난화를 둘러싼 대논쟁
스펜서 위어트 지음, 김준수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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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하며 연구를 계속 하던 갈릴레오는 로마 교황청의 종교 재판에서 지동설의 포기를 지시 받았다. 당시 시대 상황에 따라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포기한다고 선언했으나, 그가 재판에서 나오며 했다고 전해지는 말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세상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과학적 연구가 가리키는 현상을 갈릴레오는 마음속으로나마 끝까지 버리질 않았던 것이다. 과학계에서 과학자 또는 연구자들이 자신의 과학적 신념을 져버리지 않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지금은 현대물리학의 최전선에 있는 양자역학만 하더라도, 등장 당시에는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여러 세계적 석학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토머스 쿤은 자신의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이렇게 한 시대의 사람들이 가지는 신념체계의 근간을 패러다임이라고 말했다. 이 패러다임이 깨지고 새로운 이론을 수용하는 것을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하며, 이것은 과학 발전의 과정으로 ‘과학 혁명’이 된다. 그리고 20세기 말, 지금까지와 다른 아주 복잡한 성격의 연구가 과학자뿐만 아니라 거의 전 세계의 인류에게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했는데, 그것이 바로지구 온난화이다.
누가 지구온난화를 가장 먼저 주장했다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1896년의 아레니우스가 인류의 이산화탄소 배출에 따른 지구온난화 가능성을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발표했다. 단순히 업적만 두고 본다면 아레니우스가 최초로 지구온난화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이 곧 지구온난화라는 전 지구적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모델을 제시했다고는 할 수 없다. 실제로 아레니우스 이후 많은 과학자들이 지구온난화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을 전개했다. 체임벌린은 해양순환에 의한 지구 탄소 교환 모형을 만들고, 베르나드스키는 생명체의 영향력이 여타 물리적 힘에 비견될 만큼 지구를 개조할 수 있다고 시사했다. 그밖에도 지구온난화에 일찍부터 관심을 갖고 다양한 원인을 주장한 사람을 열거하면 의외로 적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지구온난화에 대한 선구적 관심과 그 연구가 바로 당대 사람들에게 지구온난화라는 지구적 재앙을 납득시킬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심지어 그들의 연구는 지구온난화를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지구적 현상으로 이해하는 수준에 머무르기도 했다. 1938년에 영국 왕립기상학회에서, 산업화의 결과로 배출된 수백만 톤의 이산화탄소가 기후를 바꾸고 있다고 주장한 캘린더도 지구온난화를 지구적 재앙으로서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지구온난화로 인하여 인류의 작물수확량이 증가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사람들에게 평균 기온의 상승은 그렇게 위험한 문제로 다가오지 않았던 것이다.
지구라는 시스템은 단편적인 연구만으로 결론을 내리기에 너무 복잡했다. 지구온난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분야를 중심으로 이론을 전개하고 지구온난화의 가능성에 도달했다. 지구온난화라는 현상에 대한 연구는 기상학과 지구물리학의 발달로 그 기회가 열리게 되었다. 서구를 지배하던 실용주의적 관점이, 오히려 지구온난화라는 막연한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20세기 초, 2차에 걸친 세계대전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전투는 국지적인 기상의 이해를 요구했다. 기상학은 눈부신 발전을 할 수 있었다. 많은 자연과학과 기술이 그러하듯, 기후에 관한 기상학도 전쟁의 수혜를 톡톡히 입은 것이다. 예를 들어 1942년부터 시카고대학교의 기상학과는 물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기후에 대한 복합적 이해에 도달하고자 기상학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전쟁으로 인해 이 기상학 프로그램은 지연되었으나, 시카고대학교 기상학과는 오히려 그 규모는 커지게 되었다. 동시에 1700여명의 군 기상학자를 훈련하고, 기상학에 대한 지식의 양도 점차 많아졌다. 기상학은 전쟁에서 상륙작전이나 폭탄투하 등에 필요한 다양한 기후 정보를 제공하며 활약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도 세계의 군사적 긴장상태는 계속되었으므로, 군에서 기상학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지 않았다. 이처럼 기상학, 즉 지구물리학은 최소한 미국에 한해서는, 전후에도 정부에서 지원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당시의 지구물리학이 지구온난화를 목적으로 연구를 한 것은 아니었다. 지구물리학이 발전하면서 개별적인 연구자들 간의 교류도 활발해졌다. 게다가 당시 UN 같은 세계기구가 등장하던 시대 상황에 맞물려, 1951년에는 세계기상기구(WMO)가 설립되었다. 나아가 1958년에는 여러 국가와 단체들의 다양한 이해가 수렴된 국제지구물리관측의 해(IGY) 위원회가 발족하였다. 지구물리학의 공식적인 국제적 위원회의 효시 중 하나인 IGY는 여전히 지구온난화라는 기후변화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전의 지구물리학이 가지던 위상과 같이, 특정 집단에게 이익이 되는 정보를 얻거나 순수한 과학적 목적이 우선되고 있었다. 킬링 역시 그런 IGY 위원회에서 연구비를 받아 이산화탄소 농도를 측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전 지구적 이산화탄소 농도 측정 연구는 이후 ‘킬링 곡선’으로 거듭나서 지구온난화에 대한 경고장으로 작동하게 된다.
킬링 곡선이 보여주는 것은 자명했다. 이산화탄소 농도는 1960년대 이후로 매년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었다. 킬링 곡선이 보여주는 추이에 대해 ‘문제’라고 인식하는 과학자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기상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 대한 그 어떤 연구보다도 킬링 곡선은 명확한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산화탄소는 온실가스고, 분명 이산화탄소가 증가하는 만큼 지구의 온도도 상승할 것이란 것이었다. 1960년대에는 환경문제에 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었는데, 지구온난화 역시 그 관심을 조금이나마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는 전 지구적 기상학 연구 측면에서 부족한 관심이었고, 지구온난화를 대중과 정치인들에게 환기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었다. 케네디 대통령의 WMO에 대한 지원 역시 더 나은 기상예보, 궁극적으로 기상통제를 목표로 하는 국제 협력을 촉구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기상학 연구 방법은 계속해서 발전했다. 생물학이나 지질학, 화학 같은 다른 과학 분야의 발달로 과거의 꽃가루나 원시 동물의 사체, 토양의 퇴적 등 여러 요인을 분석하여 과거의 기상정보를 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대전 이후로 꾸준히 발전한 컴퓨터는 대규모 지구물리 모델을 손쉽게 시뮬레이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기상학 정보가 누적되고 다양한 모델이 생겨나면서 킬링 곡선의 예측이 단순한 일이 아닌 것이 점차 드러났다. 비로소 많은 과학자 집단에서 지구온난화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이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점차 전쟁의 여파가 줄어들던 1970년대에 다른 여러 문제들과 함께 지구온난화도 다뤄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지구 온도 상승으로 인해 21세기의 기후변화가 발생한다는 것이 그저 미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했다.
1970년대부터 과학자들은 각종 저널과 매체를 통해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사회집단들도 과학자들의 온난화 주장에 관심을 가졌다. 지구온난화가 그저 지구적 순환의 일부이며 자연은 다시 평형상태를 되찾을 것이라는 낙관적 견해나 오히려 세계가 냉각되고 있다는 견해를 반박하는 많은 연구결과들이 쏟아졌다. 이산화탄소 외에도 온난화를 야기하는 여러 요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황산염, 메탄 같은 화학물질부터 태양활동 변화 같은 천문적인 영향, 인간의 사용에 의해 발생한 에어로졸까지 작은 듯한 요소 하나하나가 온난화를 가속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수집된 기상 정보는 겉으로 보기에는 통일성 없었지만, 이는 변덕스럽게 꾸준히 지구의 온도가 상승하고 있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지구의 온도는 분명히 상승하고 있는 것이었다! 1980년대 후반에 가서는 많은 전문가들이 사람들을 필사적으로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결실의 일환으로 1987년에 몬트리올 의정서를 통해 전 세계 정부는 공식적으로 오존을 파괴하는 특정 화학물질들의 배출을 제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온실기체 규제에 관한 궁극적인 협약은 아니었다. 오존의 파괴를 막는 것만으로 온난화를 대비할 수는 없었다. 이듬해 열린 토론토 회의에서 전문가들은 각 국 정부들이 온실기체 규제에 관한 엄격한 목표를 설정하라고 요구했다. 1980년대 말에 혹서와 가뭄으로 미국 여러 지역이 타격을 받자, 이것이 실제로 지구온난화의 영향이든 아니든 지구온난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높아졌다. 더불어서 1980년대는 기후연구에 관한 출판물이 급증하고 많은 워크숍과 회의가 열렸다. 대중의 관심이 과학자들의 관심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결국 1988년에 WMO와 여러 UN 환경기구들은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IPCC)’을 창설했고, 본격적으로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대처하기 시작했다.
1992년에 리우에서 기후변화 협약에 150여개 국가가 서명했음에도, 1990년대는 지구온난화를 우려하는 자들과 이익집단의 대결이 계속되었다. 거대 에너지기업이나 일부 정부는 온실가스 규제 정책으로 자신들이 입을 피해를 고려하고, 온난화가 허황된 이야기라는 연구들을 대중에 소개했다. 반면 IPCC의 보고서는 수정이 될수록 지구온난화가 명확한 경향을 보이고 있음을 확신했다. 1997년에는 일부 개발도상국들은 면제를 받되, 선진 공업국들은 온실가스 배출량을 규제할 것을 담은 내용의 교토 의정서가 발의되었다. 미국은 2001년에 교토 의정서에서 탈퇴했지만 다른 국가들의 온실가스 감축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지구온난화는 이제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았고 인류는 이를 공동의 노력으로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여러 증거들이 지구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한 행동들이 궁극적으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화석연료에 높은 세금을 물리어 화석연료 사용량을 낮추고 세수를 확보하는 것, 국가적 환경사업으로 국민의 건강과 복지를 증진하는 것, 그 외에도 많은 행동들이 실제로 미래에는 더 큰 이점이 되어 돌아올 수 있었다. 지구온난화를 예방하기 위한 공적규제들로, 한정된 자원을 남용했을 때 발생하는 ‘공유지의 비극’을 해소하고 공익을 지킬 수 있다는 인식이 사람들에게 확산되어 갔다.
인류가 점진적으로 지구온난화 예방 대책을 수립한 것 자체가 일종의 패러다임이 전환하는 과정이었다. 이 패러다임은 지구의 자연이 불변하며, 변덕은 잠시일 뿐 다시 평형을 되찾는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달로 정립된 기후모델들과 기후변화에 관한 통시적 연구결과들은 자연이 불변하는 것이 아님을 입증했다. 심지어 자연은 아주 작은 요인에 의해서도 급진적으로 바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기후변화에 관한 패러다임의 전환은 이전에 존재하던 과학혁명들과 확실하게 다른 점이 있었다. 종래의 과학혁명은 과학자 집단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과학이론이 설명하는 것과 이를 연구하는 연구자그룹은 확실한 방향성과 구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구온난화는 대부분의 경우 19세기 말부터 독립적인 기후연구들이 수렴하여 도출된 결론이었다. 당연히 각 연구결과에 대한 해석 방향도 가지각색이었다. 예전부터 일부 과학자들이 기후변화의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그저 일부 그룹의 한 가지 해석 방향으로만 받아들여졌었다. 지구온난화가 적극적으로 조명 받은 것은 단순히 과학자들의 노력뿐만 아니라 지구적 문제에 관한 대중의 인식 변화와 언론인, 정치인들의 관심이 있기에 가능했다. 전 지구적 사안을 다루는 과학이론은 일부에게만 해당하는 패러다임이 아니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의 인식이 함께 바뀌어야했다. 비록 그 시작은 선진공업국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긴 하지만 온실가스 규제 정책은 사회적 합의의 과정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즉, 과학은 그만큼 민주적인 성격을 띨 수도 있다는 것을 지구온난화라는 사안은 보여주었다. 현재보다도 미래에 대한 기대, 그리고 전 인류적 노력으로 지구적 재앙을 극복할 수 있다는 과학적 낙관이 인간에게는 있었다. 지구온난화를 둘러싼 대논쟁들은, 인류가 국경을 초월하여 합의에 이르는 민주적이고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지구적 재앙이 닥치더라도 인류가 통합하여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남겨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