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라는 내가 고등학교에 가기도 전에 그리스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건가? 나는 공부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것도 여름 방학 동안에 혼자서 공부했단 말인가? 릴라는 왜 항상 내가 해야 할 일을 나보다 빨리, 나보다 더 잘하는 걸까. 내가 따라가면 도망가면서 정작 자신은 언제나 내 뒤를 쫓아와 나보다 앞서나가려 하는 걸까.
나는 한동안 릴라를 피했다. 그만큼 화가 났다. 나도 그리스어 문법책을 빌리려고 도서관에 갔지만 우리 도서관에 비치된 유일한 그리스어책은 체룰로네 온 식구가 번갈아가며 빌려보고 있었다. 어쩌면 칠판에 그려진 그림을 지우듯이 나에게서 릴라를 지워버려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내 자신이 연약하게 느껴졌고 모든 것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것처럼 느껴졌다. 평생 그녀를 뒤쫓아 다니거나 반대로 그녀가 나를 뒤쫓아 온다고 생각하면서 살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 어느 경우건 그녀보다 못한 것은 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버티지 못하고 다시 릴라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