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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
야마다 무네키 지음, 김진아 옮김 / 빈페이지 / 2024년 12월
평점 :
[서평단 리뷰]
#헤르메스 #야마다무네키 #김진아 #빈페이지 #SF
얇은 샘플북을 들고 서울에서 지하철을 탔던 날, 지하철은 수평으로 달리는데도 나는 수직 3000m 밑으로 자꾸만 자꾸만 떨어졌었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3000m 밑의 공기를 상상하며 답답해지기도 하고, 스테이션에서 셔틀을 타고 올라가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다.
'세라'는 놀랍게도 남자였는데, 나는 이 사실을 73p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세라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피난용 지하 실험 도시에서 멘털 케어 전문가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람,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모순된 구석이 있다고나 할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다 털어놓지 않는 느낌이다. 세라를 관찰하며 읽는 사람은 보통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바라볼 텐데 '으음?'하면서 읽게 된다. 그러나 곧 깨닫게 된다. 세라도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몰랐다는 것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세라는 반드시 돌아오는 사람이었다. 이 텁텁한 공기 속, 맛있는 모닝 세트A를 먹지도 못하는 곳으로 결국에는 돌아오고야 만다. 왜일까?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은 언제고 있었다. 1992, 2012, 2019, 2025, 2043....실제로 1992년에는 우리나라에서 휴거 소동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이때 정말로 자살이나 낙태를 하거나 재산을 모두 헌납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종교적인 예언이 아니고 실제로 거대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할 가능성이 있음을 과학적으로 이야기했으니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다행으로 소행성이 비껴갔더라도 그 두려움과 공허함, 당혹스러움과 무기력감은 계속 남아 사람들을 휘감았을 것이다. 그래서 만들기 시작한 지오 X 계획. 피난용 지하 실험 도시 건설. 10년의 실험 기간. 막대한 보수. 그러나 보수를 포기하더라도 지하에 남겠다는 239명의 피험자들... 그리고 함께 남은 세라.
그들은 과거의 기억에 얽매여있다. 그들은 기억을 공유한다. 그들은 믿음을 공유한다. 나는 믿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늘 그렇듯이 어렵다.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헤르메스와는 4개월 뒤 통신이 끊긴다. 이들은 이제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했다. 그들이 지하 3000m 밑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지상에 있는 사람들은 알 수 없다. 2년 뒤에 소행성은 반드시 나타날 것인가. 소행성이 충돌할 때 헤르메스 사람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가. 헤르메스는 인류의 희망이 될 수 있는가. 아니면 그저 헛된 믿음을 가진 자들이 모인 불편한 공동체가 되었을 뿐인가.
흡입력이 좋아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후루룩 다 읽어버렸다. 그러고도 집까지 가는 역이 한참 많이 남아서 차례를 보며 나혼자 이리저리 상상해볼 뿐이었다. 뒷 이야기가 정말 정말 궁금했다는 뜻이다. 헤르메스, 내 책장 속 저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