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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들의 세상은 내가 사는 세상이다 - 세상 끝에서 경이로운 생명들을 만나 열린 나의 세계
나이라 데 그라시아 지음, 제효영 옮김 / 푸른숲 / 2023년 10월
평점 :
✍️🏻 나는 그 모든 것에 경의를 느끼는 한 마리 포유동물이 되어 조용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150 p.)
나이라 데 그라시아는 기후 변화와 크릴 어업이 남극의 지표 생물인 물개와 펭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는 현장 연구자였다. 이 책에는 그가 남극 리빙스턴섬의 시레프곳 기지에서 보낸 2016년 봄부터 다음 해 가을까지 5개월의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 펭귄이 둥지를 짓고, 알에서 새끼 펭귄이 부화하고 직접 먹이를 구하러 바다로 나서는 모습이 펼쳐진다. 그 과정에서 ' ... 겉은 보송보송한 털로 감싸인 풍선을 쥔 기분 (152 p.)' 이 들게 하는 새끼 펭귄을 만나기도 하지만 가혹한 자연의 섭리를 마주하기도 한다.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저자가 급한(!) 용변을 보는 도중 만난 펭귄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 ... 그때마다 펭귄 두어 마리가 이렇게 흥미로운 일은 처음이라는 듯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가까이 다가와서 내 엉덩이를 열심히 살폈다. 펭귄들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싶으면서도 그 순간 내가 반발심을 느낀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지난 몇 달 동안 펭귄을 관찰하면서 생신 깊은 친밀감은 다 어디 가고, 그때만큼은 '제발 쳐다보지마!'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서로의 입장이 단수에 뒤집힌 순간이었다. (143 p.)
그는 처음에는 모든 펭귄이 다 똑같아 보였지만 (45 p.)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펭귄도 인간만큼 개성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76 p.)고 말했다. 각자의 개와 고양이를 떠올리면 바로 알 수 있듯 저자는 펭귄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를 위해 해야만 했던 불가피한 처치나 의도치 않게 발생한 사고가 더 고통스러웠을 것 같았다.
✍️🏻 나는 펭귄을 지켜보는 그 시간을 사랑했다. (79 p.)
✍️🏻 ... 그래서 이런 일을 겪어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동물을 내 손으로 괴롭히고 있다는 죄책감을 떨칠 수 없었다. (206 p.)
한편 그는 '우리가 리빙스턴섬에 온 핵심 목적도 크릴이었다. (210 p.)' 고 썼다. 이 책에서 크릴 새우를 만나게 될 줄 몰랐는데, 몇 년 전 크릴새우 오메가3 열풍이 불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 때 뉴스에서 남획 문제를 보도하는 것을 보며 고래 먹게 놔두지, 했던 기억이 났다. 책을 읽고 나서야 그 작은 생물의 엄청난 존재감을 알았다. 녹은 눈 위에서 거대한 저인망 어선 두 대를 향해 중지를 치켜드는 그의 심정을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남극 동물들에 대해서는 몇몇 자연 다큐멘터리를 통해 접한 적이 있지만 한번도 앵글 밖의 인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의식주와 그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 일들의 고충을 읽으며 탄식했다. 누구보다 단단할 것 같은 이들이지만 그들이 심신을 보살피고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슬럼프를 이겨내는 모습을 보았다. 현장 연구자의 삶을 들여다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더욱 흥미롭게 읽은 것 같다.
『펭귄들의 세상은 내가 사는 세상이다』 의 원제는 『The Last Cold Place』. 책을 다 읽고 보니 한국어판 제목은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기도 하다. 왜 제목을 이것으로 선택했을까 생각했다. 그러다 이 책에서 던지는 여러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함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펭귄들의 세상이 곧 지구이므로, 내가 사는 세상이기도 하다. 기후 변화와 크릴 어업에 대한 경고이자 남극과 펭귄이 미래에도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였다. 그리고 아마도 저자가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어온 미래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을 것이다.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턱끈펭귄의 유영 장면이 보고 싶어졌다. 오래 오래 볼 수 있다면 더 좋겠다.
✍️🏻 파도 속에서 그렇게 펭귄이 보고 느끼는 세상을 함께 보고 느낄 때, 익숙한 경이로움이 밀려오던 순간을 기억한다. 펭귄들의 세상은 내가 사는 세상이다. (371 p.)
여담: 가장 반가웠던 이야기에 대하여 - ' ... 펭귄 식생활 연구는 동물 실험 윤리위원회가 펭귄에게서 표본을 얻는 방식이 지나치게 침습적이므로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365 p.)'